“회사를 판 게 아니다, 1등 만들 베스트 오너 찾아준 것”

중앙일보

입력 2016.05.04 03:00

업데이트 2016.05.05 04:15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룹의 실질적 리더 역할을 해온 지 2년. 그는 화학·방산 6개 계열사를 매각하며 사업 재편에 주력해 왔다. 매각한 화학 계열사들이 좋은 실적을 내면서 매각이 성급했던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온다.

이 부회장, 미국인 경영자에게 언급

이에 대한 이 부회장의 답변은 뭘까. 이 부회장은 “회사를 판다고 얘기하지 않겠다. 각 회사에 베스트 오너(최고의 주인)를 찾아주려 노력하는 것(I would not say I’m selling the business. I would say I try to find the best owner for that business)”이라고 말했다.

3일 삼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최근 한 미국인 경영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계열사 매각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기사 이미지

지난 2년간 추진한 계열사 재편 작업에 대한 자신만의 경영철학을 밝힌 것이다. 사업구조조정에 대한 이 부회장의 의중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는 10일이면 이건희 회장이 입원한 지 2년이 된다. 지난 2년간 이른바 ‘JY 체제’에서 삼성그룹이 빠르게 추진해 온 사업구조 재정비는 이 부회장의 이 같은 ‘베스트 오너론’이 배경이 됐다. 이 부회장은 매각 원칙에 대해서도 밝혔다. “펀드에는 팔지 않는다. 1등으로 만들 기업에만 넘긴다”는 것이다. 매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업의 성장을 우선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발언은 1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글로벌 경영 환경을 감안한 발언”이라며 “매각이든 인수든 ‘삼성이 1등을 할 수 있는 사업이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이 “우리가 어떻게 해도 화학 1등은 못한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베스트 오너론’이 드러나는 대목은 또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라이온즈를 언급하며 “명색이 프로구단인데 (흑자를 내지 못해) 모기업에서 매년 수백억원씩 지원을 받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평소 야구장을 자주 찾을 정도로 소문난 야구광이지만 야구단조차도 비즈니스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매각된 회사의 임직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삼성의 우산 아래에 있다는 것에 당장은 안도감(sense of relief)과 자긍심(sense of pride)을 느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는 주인을 찾는 게 임직원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모든 회사에 무한한 자원과 에너지를 쓸 수 없다. (우리의) 에너지는 제한돼 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계열사 정리는 2014년 11월 본격 시작됐다.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테크윈·삼성탈레스·삼성토탈 등 화학·방산 4개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팔았다. 이듬해엔 삼성정밀화학·삼성BP화학과 삼성SDI의 케미칼 사업부문을 롯데에 넘겼다. 제일기획은 프랑스 광고회사와 매각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건설·외식·카드 사업도 매각설이 돌고 있다.

학계에선 삼성의 구조조정을 ‘문어발식 경영 시대의 종언’으로 분석한다. 대기업이 자금력을 배경으로 어떤 사업이든 뛰어들면 성공할 수 있었던 선단(船團)식 모델은 고도 산업사회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사업보국(事業報國)’은 산업 기반이 전혀 없던 당시의 가장 절실한 정신이었고, 이건희 회장의 ‘질(質) 경영’은 그만그만한 기업들이 경쟁하던 시절에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영철학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이 된 지금의 삼성그룹에는 새로운 경영 방식이 필요한데 이재용 부회장은 이를 ‘1등 사업 집중’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관련 기사

① 삼성물산 이서현 사장 “브랜드 인수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

② ‘이재용 구두’ 소문 나자 주문 10배 넘게 늘었죠

그러나 이 부회장이 빠른 속도로 그룹을 재편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사업 강화’ 속도는 느리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구글은 10년 사이에 유튜브·안드로이드·딥마인드 등 200개에 가까운 기업을 인수했다”며 “신성장동력을 확보하려면 좀 더 빠르게 인수합병(M&A)을 단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삼성그룹이 대한민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을 고려할 때 이 부회장의 비전 제시는 명확할수록,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박태희·임미진 기자 adonis55@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