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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60년 혈맹’ 베트남, 제재리스트 북한 외교관 서둘러 추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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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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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 북베트남 주석(오른쪽)을 접견하는 북한 김일성 수상. 북한과 베트남은 1964년 김일성의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혈맹관계를 맺었다. [사진 bacgiang.net, 중앙포토]

한때 혈맹(血盟)을 자부했던 북한과 베트남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4차 핵 실험을 비롯한 북한의 잇단 도발 행보로 베트남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3월 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가 발표된 이후엔 노골적이기까지 합니다.

유엔 제재안 나오자마자 단행
평화포럼 나온 베트남 인사들
“북한 핵개발 안 도왔다” 강조
‘사회주의 형제국’의 격세지감

지난달 말 수도 하노이와 최대 경제도시 호찌민을 직접 둘러보면서 냉랭해진 베트남의 대북 시선을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유엔의 대북제제 이행에 베트남이 적극적인 게 눈에 띕니다.

안보리 제재 리스트에는 북한 단천상업은행 베트남 대표부 간부 2명이 올라있는데요. 지난달 23일 최성일 부대표는 자진출국 형태로 평양행 비행기에 올라야했죠. 외교관 신분인 최 부대표를 베트남이 신속하게 출국 조치한 걸 두고 현지에서는 사실상 추방이란 얘기가 나왔습니다. 총책 역할을 한 김중정 대표의 경우 지난 1월 베트남을 떠난 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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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 인민무력부장(왼쪽)이 지난해 11월 베트남을 방문해 쯔엉 떤 상주석을 접견하고 있다. [사진 bacgiang.net, 중앙포토]

베트남 공산당 간부들의 입을 통해서도 북한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지도층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지난달 27일 하노이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주최로 열린 한·베트남 평화통일 포럼에서 또렷이 드러났죠.

베트남 측 토론자로 나선 팜홍타이 사회과학한림원 동북아연구소 부소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으로 표기)의 도발 행위는 안보리의 규정을 위반한 행위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제시한 경제·핵 병진 노선에 대해서도 “북한이 무기 개발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진행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한국측 발표자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강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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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측 인사들은 무엇보다 북한의 핵 개발을 베트남이 돕거나 방관한 듯한 비쳐질까봐 우려하는 눈치였습니다. 레반상 아태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유엔 대북제재 결의에 북한이 베트남에 군사교관을 파견한 사실과 단천상업은행 베트남 대표부가 언급된걸 두고 “오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유의해달라”며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 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 발전을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쳤죠.

이뿐만 아닙니다. 포럼에서는 베트남에서 인기 절정인 한류(韓流) 문제와 한·베트남 협력방안도 다뤄졌는데요. 북한으로의 한류 유입실태를 연구해온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자 베트남 측 인사들 사이에선 뜻밖의 맞장구가 터져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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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평양을 방문한 농득마인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왼쪽)을 맞이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 bacgiang.net, 중앙포토]

쩐꽝민 사회과학한림원 동북아연구소장은 “북한 주민들은 최고지도자로부터 일방적인 선전·선동 정보를 받고, 그에 피동적으로 따르고 있다”며 “이들에게 다른 나라의 발전된 경제·정치와 사회·문화상을 알리는 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죠. 그는 “한국의 경우 북한과 같은 민족이고 언어와 문화 등이 매우 유사해 한류 확산은 한반도 사회통합에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공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행사를 두고 각별했던 북·베트남 관계의 변화된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란 평가가 나왔는데요. 1960년대 공군 조종사 등을 베트남전에 파병해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불렸던 때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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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박장성에 위치한 참전 북한군 묘비. [사진 bacgiang.net, 중앙포토]

베트남 공산당 통치이데올로기의 산실(産室)로 불리는 사회과학한림원 관계자와 당원 등 100명이 객석을 메운 것도 눈길을 끌었죠. 현지 우리 공관 관계자는 “대북 제재를 다룬 포럼에 이처럼 많은 베트남 핵심 인사들이 참여한 건 이례적”이라고 귀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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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당국의 이런 분위기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노선에 이탈해 전대미문의 3대세습을 이룬 북한 김정은 체제에 대한 불신 때문이란 해석이 나옵니다.

또 1980년대 후반 도이모이(Doimoi) 정책을 채택해 개혁·개방의 길을 걷고 있는 베트남으로선 한국과의 경제협력이 훨씬 긴요하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1992년 수교 때 5억달러였던 한·베트남 교역규모는 지난해 376억달러를 기록했는데요. 서울행 비행기로 향하는 공항로 옆에는 4만여명 베트남 근로자들이 일하는 삼성전자 휴대폰 공장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호찌민·하노이=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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