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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97세 노철학자의 건강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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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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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97세 노인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다. 언론은 장수의 비결을 묻는 인터뷰 기사를 앞다퉈 싣고 있다. 40년째 매주 세 번은 꼭 수영을 하고, 아침 식사로는 무엇 무엇을 드시고. 비슷비슷한 기사 속에 뭔가 더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글을 쓴다. 김형석 교수님은 나의 처외조부 되신다.

내가 생각하는 노교수의 건강 비결은 먼저 ‘부지런함’이다. 20년째 댁에 갈 때마다 서재엔 언제나 쓰고 계신 새 원고가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뭐하셨는지 묻지만 실은 언제나 똑같았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강연을 하셨다. 그중 어떤 것은 알려지고,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거리 두기’다. 총장이니 장관이니 남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탐내는 자리들에 한 점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다. 자식들 일도 그들이 묻기 전에는 먼저 말씀하지 않는다. 여기서 들은 얘기를 저기에 전하지도 않는다. 철없는 아들 걱정에 하소연을 늘어놓는 딸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철이 나야 걔가 철이 들지.” 한마디 하시더란다.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간섭하지 않는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지만 맹목적인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을 뿐이다. 뭔가에 열광하거나 뭔가에 분노해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들이 가득한 시대에 그는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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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인생이라 아쉬운 게 없어 그럴 거라며 입을 삐죽일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1947년 맨손으로 월남한 후 6남매를 키우셨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교육받아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부부싸움도 아이들이 못 듣게 방에 들어가서 하며 언제나 웃음으로 남편을 맞던 부인이 그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며 20년 세월을 자리에 누웠다. 그는 그런 부인을 차에 태워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여주고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다. 결국 부인을 떠나보낸 지 10년이 넘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부인의 손때 묻은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아주 가끔 딸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정초에는 송추에 있는 이북 식당에 가서 평양냉면을 드시며 고향을 생각한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숭실학교를 다니던 고향. 어느 날 노교수는 딸에게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