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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면 이 정도 유머는 해야"…큰 웃음 선사한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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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마지막 백악관 기자단 만찬사'는 조크와 유머로 미국 정치를 풍자한 촌철살인의 압권이었다. 뼈있는 농담에 워싱턴 D.C의 힐튼호텔 대연회장에 모인 2600명의 기자들과 할리우드·스포츠 스타, 여야 정치인 모두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오바마는 도널드 트럼프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화당 경선부터 시작해 힐러리 클린턴·버니 샌더스·테드 크루즈·트럼프를 차례대로 도마 위에 올렸다. 물론 임기를 얼마 안 남긴 자신의 처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먼저 이날 식사메뉴가 '고기와 생선요리 중 택일'인 점에 빗대 공화당 지도부가 추진하는 '중재전당대회'의 움직임을 꼬집었다.

"오늘 공화당 지도부의 많은 이들이 선택 메뉴에 (고기냐 생선을 택하지 않고) '폴 라이언'이라고 적었다. 당신들은 고기나 생선을 싫어할 수도 있을 게다. 그건 당신들의 선택이다."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트럼프나 당내 '이단아'인 크루즈를 배제하고 경선에 참가도 하지 않았던 라이언 하원의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려는 공화당 지도부의 행태를 '메뉴판에 없는 메뉴'로 비꼰 것이다.

자신이 속한 민주당의 후보에 대해서도 따끔한 펀치를 날렸다.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겨냥한 듯 "오늘이 내 임기 중 마지막 '백악관 기자단 만찬'이다. 오늘 만찬사가 성공적이라면 내년 (퇴임 후) 골드먼삭스에서 이를 써먹으려 한다. 그러면 상당한 '터브먼'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해리엇 터브먼은 미 재무부가 신 20달러 지폐의 인물로 쓰겠다고 발표한 19세기 흑인 인권운동가. 국무장관 퇴임 후 골드먼삭스에서 거액의 강연료를 챙긴 클린턴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오바마는 또 클린턴이 젊은층으로부터 인기가 없는 점을 겨냥, '페이스북을 사용할 줄 모르는 나이든 할머니'로 묘사했다. 하지만 "내년 이맘때면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그녀(she)'가 누군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며 은연 중에 유일한 여성후보인 클린턴을 띄워주었다.

대선 경선주자로는 유일하게 이날 행사에 참석한 샌더스를 향해선 "젊은이들에겐 큰 인기가 있다"면서 "동무(comrade)"라고 불렀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의 진보적 정책을 빗대 공산당이나 사회당에서 당원이나 서로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을 쓴 것이다.

공화당의 크루즈 후보에 대해선 '말'을 문제삼았다. "언제나 자신에 유리하게 말을 수시로 교묘하게 바꾼다"는 여론의 '크루즈 평'을 빗대 "그는 농구골대(basketball hoop)를 농구 링(ring)이라 하고, 야구 배트를 야구 막대기(sticks), 미식축구 헬맷을 미식축구 모자라 한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날 '오바마 정치 유머'의 최대 표적은 역시 트럼프였다. 언론의 관심도 온통 '오바마 대 트럼프'였다.

5년 전인 2011년 4월 이 행사에 참석한 트럼프는 오바마로부터 망신을 당하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는 게 미 언론들의 분석이다. 당시 오바마는 "내 출생의혹을 제기한 트럼프가 여기 와 있다. 근데 하와이 출생기록이 공개됐으니 트럼프는 이제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조작됐는지, 로스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47년 외계생명체가 추락했다는 주장) 규명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조롱했다. 트럼프는 "난 당시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데 언론들은 다르게 쓰고 있다. 그래서 올해는 참석을 않겠다"며 불참을 결정했다. 대신 아들 에릭, 도널드 주니어가 참석했다.

오바마는 "오늘 트럼프가 참석을 안해 좀 아쉽다. 지난번에 참 즐거웠는데…"라고 운을 떼었다. 그리곤 "오늘 이 자리가 트럼프에겐 싸구려같나. 그럼 대신 뭘 하고 있을까. 집에서 '트럼프 스테이크'(트럼프가 창업했으나 사실상 도산함)를 먹고 있을지, 아님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를 모욕하는 트윗이나 날리고 있을까"라고 풍자했다.

이어 "공화당 지도부는 '공화당 후보 트럼프'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트럼프가 외교경험이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외국의 지도자들과 만나왔다. 미스 스웨덴, 미스 아르헨티나, 미스 아제르바이잔…"이라고 웃음을 유도했다.

오바마는 끝으로 자신의 현 처지도 유머로 표현했다.

비디오에 카메오로 출연한 옛 자신의 정적, 존 베이너 전 하원의장(공화)으로부터 "난 어제 오전 11시 30분에 맥주를 마셨어. 맥도날드 아침 스페셜메뉴는 하루종일 주문이 가능해"란 '은퇴 후 조언'을 들은 오바마는 "힐러리가 언젠가 내게 '새벽 3시에도 전화를 받을 준비가 돼 있느냐'고 물었지. 이제 난 (나이가 들어) 새벽에 화장실을 가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일어나 있다오"라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또 "8년 전 나는 이상주의와 힘으로 넘치는 젊은이였는데, 지금 나를 보라. 회색머리에 관으로 들어갈 날만 남았다"고 했다.

연설 마지막에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이제 딱 두마디만 남았다"며 '오바마 아웃(Obama Out·오바마는 사라진다)'을 외치며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떨어트렸다. 가수들이 멋진 공연임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제스처를 흉내내며 자신의 퇴장을 알린 것이다.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 대통령이 '코미디계 최고사령관'으로서 마지막 공연을 멋지게 해냈다"고 극찬했다.

워싱텬=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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