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판결 인사이드] 타부서 송년회에서 만취해 사망…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은?

중앙일보

입력

기사 이미지

회사 타 부서 송년회에서 평소 주량을 넘는 술을 먹고 취한 상태로 집까지 걸어 가던 장모씨는 공사장 맨홀 구멍에 빠져 사망했습니다. 이 경우, 회사는 장씨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까요?

법원은 ‘그렇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부장 이진만)는 숨진 장씨의 아내가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일 밝혔습니다.

장씨는 전자업체 시제제작반에서 일하는 근로자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13년 12월 10일 저녁. 당시 옆 반의 조장 김모씨는 자신들의 송년회 자리에 시제제작반 직원들을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장씨의 동료들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이 어렵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장씨는 혼자 그 자리에 가게 됐습니다. 장씨도 집에 임신한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의상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출 요량이었습니다.

평소 주량이 소주 5잔 정도인 장씨는 이날 소주 2병 정도의 술을 마시고 오후 7시쯤 빠르게 자리를 떴습니다. 장씨의 집은 회식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평소 이용하던 지름길인 공사현장을 가로질러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쿵-'.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장씨는 공사장 근처 뚜껑이 열린 채로 방치돼 있던 맨홀 속으로 떨어졌고 다음날 사망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장씨의 아내는 “남편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습니다. 그녀는 “회사 측의 초대로 참석한 송년회 자리에서 먹은 술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장의비는 근로 기준법에 규정된 재해 보상의 하나로 근로자가 업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하였을 때에 회사는 평균 임금 90일분의 금액을 지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장씨의 죽음이 회사 업무와 관계가 없다고 보고 거절했습니다. “장씨가 참석한 송년회는 자신이 소속된 부서도 아니며, 강제성 없는 자발적 참석이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아내는 처분에 불복해 다시 한 번 심사청구를 했으나 재차 기각됐고 지난해에는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에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이 또한 기각됐습니다. 결국 아내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아내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송년회는 법인카드로 결제한 회사 공식행사"라며 "술을 권하지 않았다고 해도 업무상 회식자리에서의 과음으로 발생한 사고는 사실상 근로자를 방치한 회사의 책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근로자가 회사 밖의 행사나 모임에서 재해를 당한 경우 ▶행사의 전반적인 과정이 회사 측의 지배나 관리를 받은 상태에 있고 ▶근로자가 그 행사나 모임의 순리적인 경로를 벗어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고 인정될 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회사가 주최한 행사라는 것이 확실하고 특별히 다른 이유 없이 그 행사의 참여로 인해 발생한 사고 경위가 인정된다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습니다.

재판부는 또 “장씨가 속한 시제제작반과 송년회를 주최한 다른 반은 매우 긴밀한 협조ㆍ보완 관계이고 둘 다 같은 제조팀에 속해 있다”고 근로복지공단의 거절 이유도 반박했습니다. 이어 “사고가 발생한 귀갓길도 평소 이용하던 일반적인 곳으로 사고가 발생한 것은 과음으로 인한 판단능력 장애가 주된 원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정혁준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