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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쑨정차이, ‘충칭속도’서 보시라이 흔적 지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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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8 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월 올해 첫 시찰지 충칭을 방문한 사진이 인민일보 1면에 게재됐다. 시 주석은 15년 연속 두 자릿수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충칭에 사흘간 머무르며 창장(長江) 내륙항인 궈위안 항구와 디스플레이 업체 BOE를 방문했다. [사진 인민일보]

8분기 연속 중국 내 경제성장률 1위에 15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 세계 노트북 3대 중에 1대를 만들어내는 정보기술(IT) 산업기지, 중국의 디트로이트라 평가받는 자동차산업, 독일 뒤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철로망을 창장(長江) 수운과 결합시킨 사통팔달의 물류…. 중앙SUNDAY는 지난주 맹렬한 기세로 고속성장 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충칭(重慶) 속도’의 현장을 리포트한 데 이어 충칭의 눈부신 성과를 빚어낸 주역 정치인들과, 차기 대권 경쟁 구도와도 맞물려 있는 그들 간의 역학관계를 소개한다.

충칭 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국 정치인들. 왼쪽부터 ‘충칭 모델’을 주도한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 쑨정차이 현 충칭 당서기, 충칭 개발의 실무 주역인 황치판 충칭 시장. [중앙포토]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지난 1월 7일자 1면에 2장의 사진과 함께 의미심장한 기사가 실렸다. 새해 첫 시찰지로 충칭을 선택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4일부터 사흘간 현장에 머무르며 창장 내륙항인 궈위안(果園) 항구와 디스플레이 업체 BOE를 방문했다는 내용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보며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이 정치적으로도 완전 종결됐다’는 선언으로 해석했다. 물론 기사 속엔 보시라이의 ‘보’자도 언급되지 않았다.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는 2012년 심복 부하인 왕리쥔(王立軍)의 미국 망명 시도와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영국인 독살사건 등이 겹치면서 낙마한 뒤 이듬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보시라이 실각 전까지 충칭은 ‘독립왕국’ 시 주석은 현지에서 “18차 당대회 이후 충칭이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다”며 “희망은 충칭에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2012년 11월에 열린 18차 당대회를 통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했다. 따라서 시 주석의 발언은 충칭의 고속성장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중국 발전의 상징인 1980년대의 선전(深) 개발이 덩샤오핑(鄧小平)의 작품이고, 90년대의 상하이 푸둥(浦東) 개발이 장쩌민(江澤民)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시 주석에게도 자신의 상징 도시가 필요할지 모른다.


통계수치로 보면 시 주석의 발언이 틀린 말도 아니다. 충칭의 성장률이 전국 수위를 다투게 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기 때문이다. 시 주석 집권 이후 충칭이 중국 경제의 성장엔진으로 더욱 중요해진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 충칭은 시 주석이 가장 힘을 쏟는 두 가지 프로젝트인 일대일로(一帶一路) 경제권과 창장경제벨트가 지리적으로 만나는 핵심 거점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시 주석의 충칭 시찰은 뒤늦은 감이 있다. 대중과 함께 한다는 뜻의 ‘군중노선’을 강조하며 현지 시찰을 중시해 온 시 주석이 전국 31개 성·직할시 가운데 22곳을 둘러본 뒤에야 비로소 충칭 시찰에 나섰기 때문이다.


시 주석은 왜 충칭 방문을 미뤄왔던 것일까? 이는 보시라이 사건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누가 봐도 공산당 상무위원으로의 등극이 유력하던 보는 18차 당대회를 8개월 앞둔 절체절명의 시기에 실각하고 말았다. 그 직전까지 충칭은 보의 ‘독립왕국’이었다. 경제성장과 균형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며 노동자·농민 등 서민 계층의 민생을 중시한 ‘충칭 모델’을 내걸었다. 이는 시장경제로의 개혁 가속화로 성장을 추구하는 ‘광둥 모델’과 대비되며 어느 노선이 옳은지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창훙다헤이(唱紅打黑)’ , 즉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의 혁명가를 부르게 하는 등 극좌 이념을 강조하고 강력한 공권력으로 폭력조직 등을 때려잡는 정책을 폈다. 실각 전의 보는 서민층을 중심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최근 현지 취재 기간에도 “보시라이는 아직도 우리 마음속의 지도자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민생공정’ 덕분에 충칭으로 돌아와 보시라이의 후임자로 부임한 쑨정차이(孫政才) 충칭시 서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보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는 ‘지주불설(只做不說)’ 즉 ‘말없이 일만 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보시라이의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충칭의 38개 구·현 가운데 26곳의 책임자를 교체했다. 동시에 시진핑 노선의 충실한 집행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13년 인민일보에 게재한 기명 논설이나 올해 공산당 이론지인 월간 『추세』에 게재한 논문이 그 예다. 시 주석의 방침에 따라 공산당 간부들의 자아비판 모임인 ‘민주생활회’를 다른 지방보다 일찍 부활시킨 곳도 충칭이었다. 따라서 이런 가운데 이뤄진 시 주석의 충칭 시찰은 보시라이의 세력을 평정하고 영향력 제거 작업을 끝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충칭 현지 취재 과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융(西永) 마이크로산업단지 진열관에는 충칭 경제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은 2014년 충칭에서 출발한 열차가 독일의 뒤스부르크 역에 도착하는 현장에서 시 주석이 박수를 치고 있는 장면이었다. 대신 일찍이 이 노선을 개통시킨 보 전 서기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충칭의 핵심인 량장(兩江) 신구(新區)는 상하이의 푸둥에 비견되는 충칭의 성장 거점이지만 이곳 전시관에선 이를 입안하고 중앙정부의 승인을 따낸 보시라이의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시 주석은 ‘18차 당대회 이후’의 성과만을 강조했지만, 충칭의 고속성장은 2000년 전후에 시작된 서부대개발 사업이 뿌린 씨앗에다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이 밑거름이 돼 이뤄진 것이다. 충칭 경쟁력의 원천에 대해 현지에서 만난 중견 간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충칭 제조업의 경쟁력은 토지 가격이 다른 대도시보다 싸고 저임의 양질 노동력이 풍부한 데 있다. 우리는 다른 지역에 앞서 지표(地票·택지 개발권) 관리제도를 실시하고 공공임대주택을 대량 공급하면서 지가를 억제했다. 다른 지방과 달리 농민공(농촌 출신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도 도시민에 버금가는 복지를 제공해 왔다. 그 결과는 농민공들의 유턴(회귀현상)이다. 충칭 인구 3200만 명 가운데 800만 명은 도시 구역이 아닌 농촌에 살고 있다. 과거엔 이 가운데 절반이 광둥이나 상하이 등 외지로 가서 농민공으로 일했다. 지금은 더 살기 좋은 충칭으로 돌아오고 있다. 앞서 말한 각종 ‘민생공정’ 덕분이다.”


이 간부는 민생공정이 언제 누구에 의해 추진됐는지는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보시라이가 지표관리 제도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고 일반 주택 대비 임대료가 40% 정도 싼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주도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지난해 말 기준 충칭의 공공임대주택은 4146만㎡에 이른다. 충칭 원주민은 물론 외지인 근로자도 공공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다.


황치판 상하이 푸둥 이어 두번째 개벽 또 한 사람, 충칭의 상전벽해(桑田碧海 )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황치판(黃奇帆) 충칭 시장이다. 그는 이미 상하이 푸둥에서 한 차례 천지개벽을 이루고 충칭에서 두 번째 개벽을 만들어내고 있다. 1952년 저장성 태생인 황 시장은 83년부터 상하이에서 15년간 일하며 푸둥 개발의 실무 주역으로 일했다. 그는 2001년 충칭 부시장으로 발탁되면서 ‘충칭맨’으로 변신했다. 9년간 부시장을 지낸 뒤 2010년 초부터 ‘부’자를 떼고 충칭의 2인자인 시장이 됐다. 충칭 성장의 중심인 량장 신구가 상하이 푸둥을 모델로 삼고 있는 연결고리는 황 시장의 경험에 있다.


충칭을 세계 최대 노트북 PC 생산기지로 만드는데도 그의 해외 세일즈 행정이 기여를 했다. 미국으로 날아가 휼렛패커드(hp) 경영진을 설득해 2009년 충칭에 공장을 유치하고 이후 대만을 방문해 세계 최대 전자제품 위탁생산 업체인 폭스콘 공장을 유치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유치를 놓고 시안(西安)과 경쟁을 벌이던 2012년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친필 편지를 보낸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황 시장은 31명의 성·직할시장 가운데 가장 높이 능력을 평가받는 인물이다. 시진핑 정부의 국정 운용 골격이 담긴 문서인 ‘전면적 개혁 심화와 관련한 중대 문제의 결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지난해 9월에는 시 주석의 미국 국빈 방문에 동행한 성·시장 6명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무원 비서장 자리를 맡겨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경제행정을 지근에서 보좌하게 할 것이라는 등의 영전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충칭의 미래는 쑨정차이 충칭 당서기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포스트 시진핑의 후보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쑨 서기가 충칭을 명실상부한 ‘서부의 상하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그의 미래도 탄탄대로가 될 수 있다. 보시라이의 뒤를 이어 부임한 그에게 가장 힘이 되는 천군만마는 황 시장이다. 황 시장은 보시라이 실각과 동시에 해임설도 나돌았지만 중국 공산당은 2013년 그의 연임을 승인했다. 공산당 지도부 역시 황치판 없는 충칭의 미래가 상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임 초기 ‘지주불설’을 강조했던 그의 행보가 시 주석의 충칭 방문 이후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4월 초·중순 중남미 3개국 순방에 나서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등 정상들을 만났다. 의미심장한 건 그에게 공산당 대표단 단장 직함이 달렸다는 사실이다. 공산당 총서기인 시 주석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국무원과 지방 당서기를 거친 쑨에게 당(黨) 외교의 경험까지 쌓도록 배려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지난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식에선 시 주석이 오직 쑨 서기와만 악수를 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 장면은 올 1월 시 주석이 연두 시찰지로 충칭을 고른 것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눈부신 고속성장에 차세대 후계구도와 얽힌 정치적 중요성까지 겹쳐 이래저래 충칭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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