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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원은 ‘베이비 파우더 피해’ 인정, 한국 법원은 회사 손 들어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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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14면

올 2월 미국 미주리주 법원은 존슨앤드존슨의 베이비 파우더를 35년간 사용하다 숨진 여성의 가족에게 회사가 7200만 달러(약 870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성이 난소암에 걸려 사망하자 유족들이 낸 소송에서다. 베이비 파우더엔 피부에 잘 발라지도록 활석 가루가 들어간다. 그런데 활석 가루에 발암물질인 석면이 포함됐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었다. 미주리주 법원은 “암 유발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며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이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으로 기업의 도덕적 책임을 물은 것이다.


2009년 식품의약품안전청(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처)은 국내에서 팔리고 있는 베이비 파우더에 석면이 들어 있다고 발표했다. 아기 엄마 220명이 “석면이 포함된 제품으로 피해를 봤다”고 법원에 소송을 냈다. 엄마들은 제조업체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제조물 책임(PL·Product Liability)과 민법상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건이 시작된 뒤 5년이 지나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가 석면이 들어 있을 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증거가 없고, 그런 가능성에 대한 관리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석면에 노출돼 있어 피해를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없다”고 했다. 국내 파우더 소송에 참여했던 로펌의 한 변호사는 “국내 법원은 제조물에 대한 명백한 결함이 인정되지 않으면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 결정을 내리고 있다”며 “개인들이 피해 보호를 받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제조물책임법과 민법을 근거로 한 베이비 파우더 사건은 239명이 사망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과 비슷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정부가 원인과 피해를 인정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지만 피해 배상은 쉽지 않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13개월 된 아기를 잃은 이모씨 부부는 2012년 “국민의 생활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화학물질에 대한 관리를 했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런데 법원은 지난해 1월 “법률에 따라 관리 의무가 있던 것은 아니다”며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2011년 8월 가습기 살균제를 사망 원인으로 추정한 질병관리본부의 발표가 있었지만, ‘명백한 원인’이라고 보기엔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소송은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135명의 피해자와 유족이 소송 중이다. 이들은 모두 제조물책임법과 민사상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을 주장하고 있지만 법에서 요구하는 제조사들의 결함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제는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한 피해 소송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석면 파우더 사건이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모두 제조물책임법을 근거로 하는데, 소비자가 주장하는 제품 결함에 대해 기업이 스스로 문제없음을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기업이 유리한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거나, 불리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악용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 법원에서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피해를 인정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예를 들어 자동차 급발진 사고의 경우 동승자가 탑승해 사고 당시 정황을 증언하지 않으면 심각한 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법무법인 바른 하종선 변호사는 “한국에서 제조물책임법으로 손해배상을 받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미국은 관련 국가기관이 직접 나서 신속하고 철저한 조사로 소비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피해자에게 유리한 합의도 많다”고 했다.제조물책임법이 널리 활용되고 있는 미국은 소송 전 관련 조사에 철저하다.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기업의 영업비밀이라도 관련된 모든 정보를 조사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나 가능한 컴퓨터 내 저장 정보 확인도 할 수 있어 법정에서 대등한 싸움이 보장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옥시레킷벤키저의 영국 본사 소송을 연구한 이영주 변호사는 “미국 재판에선 소송에 앞서 모든 정보를 오픈하고 시작하는데 우리는 피해자가 제품에 대한 기술적 정보를 알기 어려워 소송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기업은 유리한 과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소송을 이끌어 피해자를 지치도록 해 저가에 합의하거나 소송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소비자 단체 소송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리했던 법무법인 나눔 김보라미 변호사는 “한국 법원은 명확한 피해 사실이 드러나고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으면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는 데 소극적”이라며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이석 기자 oh.i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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