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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한 파티와 죽음 … 그 성장의 기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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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14면

캐서린 맨스필드

상실의 슬픔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어린 시절, 나는 상상했다.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리면 평범한 일상 자체가 불가능할 거라고. 그런데 그것은 일상의 무서운 중력을 몰랐을 때의 철없는 상상이었다. 집에서 길렀던 첫 번째 강아지 보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우리 집 딸들은 너무 많이 울어서 부모님에게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심각한 슬픔에 빠졌다. 지금도 흑진주처럼 까맣게 빛나던 보현이의 티 없는 눈망울이 눈앞에 선연하다.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강아지가 죽었으니 최소한 사흘은 잠도 못 들 것이고 밥도 안 먹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날 바로 잠이 쏟아졌다. 배도 맹렬히 고파왔다. 그런 나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다. 분명히 슬픔으로 목이 메는데 왜 자꾸 배가 고프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걸까?


어른이 된 후 더욱 뼈아픈 상실의 슬픔을 겪었을 때 역시 또다시 맹렬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내가 싫었다. 막내삼촌이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비로 평생 목발 없이 걷지 못하시다가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아직 자식이 없는 삼촌의 상주(喪主)가 되었다. 스물한 살이었던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최소한 몇 달은 웃지도 떠들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장례식 바로 다음날 친구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과연 평범한 일상의 관성이 뼈아픈 상실의 슬픔을 압도하는 것일까?

미국 인상주의 화가 필립 레슬리 헤일이 그린 ‘가든파티’(1895).

상실의 슬픔 겪어도 맹렬하게 일상으로 복귀『가든파티』의 로라는 아픈 ‘상실의 본질’을,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배우게 된다. 어느 화창한 날 화려한 가든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던 부잣집 딸 로라는 거침없는 육체노동을 해내는 인부들의 건장한 모습에 호감을 느낀다. 주변 남자 중 그렇게 힘든 육체노동을 척척 해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저녁이면 함께 춤추고 저녁이나 같이 먹는 멍청한 남자들 말고, 이렇게 씩씩하고 믿음직스러운 인부들을 친구로 사귀면 왜 안 될까.” 계급 차별은 나쁜 것이라 믿는 로라는 당시 영국 상류사회의 돌연변이였던 것이다.


온 집안사람들이 파티 준비에 열을 올리는데, 이웃의 짐꾼 스코트가 낙마 사고로 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온다. 아내와 다섯 아이를 남긴 채 가난한 짐꾼 스코트는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깊은 충격을 받은 로라는 결심한다. “우리 집 바로 근처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가든파티를 열 수는 없어.” 그제야 독자의 눈에 짐꾼 스코트가 사는 빈민가가 로라의 호화 주택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겨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빈민가와 대저택, 두 세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마음의 벽이 존재하지만, 로라는 그 벽을 뛰어넘어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라는 어머니를 설득해 파티를 취소하려 한다. “어머니, 당연히 우리가 파티를 열면 안 되겠죠? 악단과 손님들이 오잖아요. 파티 소리가 그들에게도 들릴 거예요.” 어머니는 로라를 오히려 이상한 아이 취급하고, 화려한 새 모자를 씌워 준다. “로라, 넌 참 엉뚱하구나. 그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단다. 너는 지금 사람들의 기쁨을 망치는 거야.”


로라는 엄마에게 설복당한 후,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화려한 벨벳 리본으로 멋들어지게 장식한 모자를 쓴 매혹적인 소녀의 모습. 소녀는 그렇게 자신의 페르소나를 자각한다.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면서, 빈민가의 이웃을 걱정하는 마음은 잦아들고 만다.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파티의 주인공이 된 로라는 그 흥취에 흠뻑 젖어든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악수하고 뺨을 부비며 미소 짓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 로라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파티가 끝나자 어머니는 놀랍게도 ‘남은 음식’을 빈민가에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이 완벽하고 훌륭한 음식을 보내도록 해요.” 실컷 파티를 즐기고 남는 음식을 빈민가의 장례식장에 가져다주라는 것은 연민도 자비도 아닌 그저 이기적인 생색임을, 로라는 간파하지 못한다. 가난한 자들과 ‘친구’는 될 수 없어도 그들에게 ‘적’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재빠른, 그러나 멍청한 계산속이었다.


장례식에 가는 도중, 비로소 로라는 후회하기 시작한다. 빈민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저렇게 화려한 차림을 한 아가씨가 왜 갑자기 여기에 왔을까 하는 표정이 예리한 칼날처럼 온몸에 박힌다. 뜻밖에도 스콧 부인은 로라를 친절하게 맞아주며 죽은 사람의 방으로 인도한다.


이제 속세의 모든 기쁨과 슬픔에서 멀어져 버린, 가여운 남자의 비극적인 안식이 뜻밖에 너무도 아름답고 성스럽게 느껴진다. 깊은 충격을 받은 로라는 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뛰쳐나온다. “제 모자를 용서해 줘요!”


사람들은 그녀의 뜬금없는 외침을 이해했을까. 이렇게 슬픈 장례식에 이토록 화려한 모자를 쓰고 참석한 자신의 ‘어울리지 않음’을 용서하라는 이야기였으리라. 자아를 확장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과 타인을 향한 반성적 의식의 충돌 사이에서 로라는 깊은 성장통을 겪는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잘되고 싶은 욕망, 내가 돋보이고 싶은 욕망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끝없이 충돌한다. 이제 로라는 수없이 이런 일을 겪을 것이다. 이보다 더 아픈 일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반성적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다.


트라우마 치유의 첫 단계, 순수한 주의집중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돌보면서도 그 상처에 스스로 질식당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은 자기 마음을 좋건 싫건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평정이 시작되는 시간은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순간이 아니라 ‘트라우마 따위는 없는 척하기’를 멈출 때다. 불교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순전히 관찰하는 태도를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이라 부른다.


심리학자 마크 엡스타인는 『트라우마 사용설명서』에서 ‘순수한 주의집중’이야말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첫 번째 단계임을 강조한다. 어떤 미화도 과장도 없이 마음의 추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는 자꾸 자기 마음을 판단하고 과장하고 해석하는 데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익숙한 습관을 거부하고, 마음의 천변만화한 움직임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크 엡스타인은 이렇게 조언한다. 즐거운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즐겁지 않은 것을 거부하지도 말라. 단순히 있는 그대로 거기 머물러서 ‘마음의 바람’을 느껴보자. 티베트불교 전통에서는 이 순수한 주의집중을 ‘스파이 의식’이라고 부른다. ‘스파이 의식’이라는 명칭이 무척 흥미롭다. 내 마음이면서도 내 마음이 아닌 제 3의 눈, 그것이야말로 스파이의 시선이니까. 이 스파이 의식이야말로 마음 챙김의 핵심 기술이다. 당신의 부끄러운 트라우마에 얽힌 깊은 마음의 비밀을 인식할 때, 내면의 성장은 시작된다. 트라우마는 일상의 방해물이지만, 내적 성장의 빛과 소금이다. 나를 파괴하는 트라우마가, 동시에 나를 새롭게 조형한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 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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