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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가 된 회사원, 전복장 비빔밥에 정성 듬뿍 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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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28면

전복장 비빔밥 한상. 전복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려주시던 가정식 비빔밥 그대로다. 반찬도 맛깔스럽다.

음식을 만드는데 재미를 붙였던 적이 있다. 메뉴를 하나씩 배워가는데, 내 손으로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신이 나기도 해서 꽤 열중했었다. 문제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재미있지만 뒤처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집사람에게 감사를!).


게다가 음식을 만들면 아이들이 잘 안 먹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의욕만 가득 있었고 노력은 아주 조금 했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다. 작심삼일에 익숙한 ‘옛날식’ 중년 남자의 셰프 놀이는 결국 얼마 안 가서 막을 내렸다. 잔뜩 사놓은 주방 기구와 멋지고 비싼 칼 세트만 남았다(요리책도 몇 권).


사람은 본능적으로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음식을 만드는 행위 자체를 재미있어 하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먹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의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본업이 따로 있으면서도 취미로 음식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하지만 나처럼 잠깐 불이 붙었다가 얼마 안 가 접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재미를 제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데 그 정도까지는 의욕이 부족한 탓이다. 그래도 그 중에서는 음식 만드는 것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활력과 의미를 발견하고 ‘평생의 동반자’로 삼게 된 사람도 적지 않다.

▶수라선: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 22-6 리센츠상가 지하 1층 전화 02-420-7775 일요일은 쉰다. 점심 손님이 많다. 예약은 따로 안받는다. 전복장 비빔밥 9400원. 민어 돌솥밥 9800원

IT전문가였던 김세훈(41)대표가 그 중 하나다. 음식 만드는 것을 취미로 시작했다가 거기에 빠져들면서 아예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야후코리아를 포함한 외국계 IT회사에서 16년 동안 일해 왔는데 그 경력을 그만 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식당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3월 ‘수라선’이라는 곳을 개업했다.


김 대표는 원래 음식을 만들어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게 큰 보람이었다. 이것 저것을 만들다가 게장과 전복장을 만들었는데 지인과 이웃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던 것이 계기가 됐다. 돈을 줄 테니 좀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많아 조금씩 만들다 보니 부업으로 발전했고, 이것들을 이용한 메뉴를 개발해 식당까지 개업하게 된 것이다. IT 전문가에서 식당 주인으로의 전환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이런 경험을 통한 자신감과 부인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고 한다.


메뉴는 ‘집밥’ 스타일의 편안한 가정식 음식이 대부분이다. 모두 김 대표가 직접 개발한 것이다. “좋은 재료를 합리적인 가격에 정직하게 조리해서 파는 가게”라는 김 대표의 설명대로 전복과 민어 같은 고급 재료들이 들어간 메뉴가 모두 가격이 저렴한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인공 조미료나 감미료 같은 것도 넣지 않고 가족이 먹는 음식처럼 정성스럽게 조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음식은 ‘전복장 비빔밥’이었다. 밥을 잘 먹지 않는 딸 아이를 위해 김 대표가 만들어 주곤 했던 비빔밥이었는데 이곳의 대표 메뉴가 됐다. 갓 지은 따끈한 밥 위에 특제 간장소스로 장을 담은 전복을 작게 잘라서 얹고, 큼지막한 계란 프라이를 같이 얹어 김 가루, 참기름을 뿌려 내놓는 것이 마치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에 있던 재료로 쓱쓱 만들어 주시던 비빔밥처럼 정감이 있고 맛있었다. 짭짤하고 탱글탱글한 전복 살이 맛깔스러운 간장과 계란프라이에 비벼진 밥과 함께 씹히며 넘어가는 맛이 일품이어서 순식간에 게눈 감추듯 먹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곳 음식의 또 다른 특징은 염도가 낮다는 것이다. 딸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 음식을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건강을 고려해 그렇게 신경을 쓴 것이다. 야채·과일·한약재 등을 같이 달여서 염도를 낮춘 장은 짠맛이 과하지 않으면서 풍부한 향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래서인지 손님 중에서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 먹이는 것 같은 맛있는 가정식이면서 몸에도 좋고, 가격까지 합리적이니 요즘 ‘똑똑한’ 엄마들에게는 당연히 인기를 끌만 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취미로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은 망설이지 말고 한번 시작해 보시길 권한다. 혹시 모른다. 자신의 숨겨진 재능과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서 인생 방향이 바뀌게 될지도. 아니라고 해도 인생에서 이렇게 새로운 재미가 있구나 하는 것은 최소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작하신다면 제발 나처럼 고가의 파스타 전용 냄비와 비싼 칼 세트는 사지 마시기 바란다. 무조건 후회한다. 부인에게 선물로 주려고 샀다고 둘러대도 좋은 소리 절대 못 듣는다. ●


주영욱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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