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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연재소설] 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37] 두 번째 그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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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빨간 외투와 42명의 호미니드, 이름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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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임수연

“아빠. 내가 비밀을 풀었어요!”

수리가 비밀을 풀었다고 한 순간 #아메티스트가 그리기 시작한 ‘그들’은 #출발했던 언덕부터 거쳐온 곳마다 남긴 #노래를 따라 고람동굴에 도착하는데

수리는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아메티스트가 풀썩 꺼지듯 주저앉았다.

“아메티스트!”

수리가 외쳤다. 그러나 아메티스트는 모두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곧 아메티스트는 수리가 풀어낸 비밀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메티스트가 그려낸 ‘두 번째 인류’

그들은 동굴에 도착했다. 올두바이 동굴은 꽤 컸다. 작은 나무도 있었고 있었고 긴 강도 있었다. 무엇보다 따뜻했다. 푹신한 이끼류가 땅을 덮고 있었다. 외로운 빨간 외투는 이 동굴 속에 42명의 호미니드가 터를 잡도록 했다. 그리고 42명의 종족 이름을 만들었다.

“라파누이!”

라파누이였다. 그들이 떠나온 아프리카의 어느 계곡이었다. 이제 어딜 가든 그들은 라파누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파누이는 ‘기다란 귀와 큰 키를 가진 두 발’이라는 뜻이었다. 외로운 빨간 외투도 이름이 있어야 했다. 그때 금발 머리의 아이가 외쳤다.

“수리!”

그의 머리 위에 날개 길이가 3m쯤 되는 빨간 머리 독수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로운 빨간 외투는 수리가 되었다.

20여 명의 남자들은 밖으로 나가서 사냥을 하며 먹을거리를 가져왔다. 그들의 여자들은 아기를 낳고 키우며 종족의 수를 불려 나갔다. 라파누이 종족의 귀는 점점 길어졌고 키도 점점 커져서 이 동굴에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떠나야만 했다. 그들의 진짜 집으로 가야 했다.

아직은 어디인지 모르지만, 수리와 라파누이가 가야 하는 그 집의 주인은 항상 수리에게 작은 단서들을 하나씩 던져왔다. 지평선을 반짝이던 물의 파편, 빛의 강, 하늘의 불꽃과 눈의 빛 그리고 오늘 또 다른 단서가 나타났다.

하늘의 문이 열렸다. 하늘은 시커먼 얼굴로 그르렁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빛도 한 조각 없이 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와락 밝아지며 하늘의 문에서 그것이 내려왔다. 수리와 라파누이는 어느덧 달려갔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너른 벌판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것을 찾아 헤맸다.

그때 그 어딘가 길목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들도 하늘의 문에서 떨어진 그것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았다. 수리와 라파누이는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종족을 처음 보았다. 그들도 처음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오로지 자신들만 있는 걸로 알았던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사실 그들이 세상에 유일한 생명체는 아니었다.

그들이 출발했던 땅은 현재의 앙골라와 나미비아 국경 근처에 있는 어떤 언덕이었다. 그 언덕의 이름은 ‘동경 12.5도 남위 17.5도’였다. 이곳에 그들과 비슷한 집단 14개 정도가 서로 모르게 존재했다.

당시 아무도 그 언덕을 넘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낮게 흐르는 길고 작은 냇가에서 물을 구했고 나무에 열린 과일과 토끼 고기도 충분했다. 그러나 어느 날, 냇가의 물은 말라버렸고 나무에서 과일은 열리지 않았고 토끼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라파누이 종족만이 동경 12.5도 남위 17.5도의 언덕을 넘어 최초로 빛의 강을 보았던 것이다.

라파누이와 마주한 그들은 매우 작았다. 키도 작았고 덩치도 작았고 귀도 작았다. 그들은 9명이었다. 어쨌든 싸움은 시작되었다. 덩치가 큰 라파누이족은 그들을 얕잡아 봤다. 하지만 그들은 작지만 날쌨다. 처음에 한 놈이 투척 창을 던져 적이 쓰러지면 여럿이 달려나와 쓰러진 놈을 집단공격했다.

그동안 라파누이가 상대한 적이라곤 짐승뿐이었다. 짐승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먹기 위해서 싸웠고 죽였다. 뚜렷이 내세울 무기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덩치가 작고 귀가 작은 대신 투척 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며 의지해 싸우고 있었다.

수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진짜 집에 가기 위해서는 이들을 반드시 물리쳐야 했다. 수리는 라파누이와 함께 동굴로 돌아갔다. 그들이 동굴로 쉽게 쳐들어오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수리는 동굴의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 낮의 전투 장면을 그렸다.

롱고롱고의 문자,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반짝이던 물의 파편을 그렸고, 일렁이던 빛의 강을 그렸고, 하늘의 빛과 커다란 눈의 빛을 그렸고, 독수리의 날개를 그렸다. 그리고 라파누이가 만났던 그들과의 싸움을 그렸다.

그들은 강 근처에서 머물렀다. 강을 떠나지 않았다. 수리는 그들을 물의 종족이라고 불렀다. 라파누이는 물의 종족과 계속 싸웠다. 여자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을 보호해야 했다. 싸움은 532번의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시 비가 내렸다. 오래도록 내렸다. 72번의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비가 내렸다. 땅에 물이 넘쳤다. 동물과 식물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물의 종족들은 동굴 앞에 와서 살려달라고 울었다. 수리는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서로 남녀로 맺어졌다. 그리고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미래를 예측한 증거가 남은 고람동굴

비가 멈추었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수리는 밖으로 나갔다. 12번의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는 물이 할퀴고 지나간 벌판을 헤매었다.

하늘의 문에서 떨어진 그것을 찾고 있었다. 수리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깊은 우물을 만났다.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수리는 당장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렸다. 당시 수리의 주변에 노인은 거의 없었다. 동물에게 먹히거나 병들어 죽지 않는 이상 거의 20세가 되면 자연사했기 때문에 노인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노인의 얼굴은 마른 땅이 갈라진 것처럼 지독하게 뻑뻑했다. 노인은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을 찾는가?”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는 기록했나?”

수리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동경 12.5와 남위 17.5도의 계곡부터 올두바이 동굴까지, 거쳐온 모든 곳에 노래를 그림으로 남겼다.

“노래를 불러라.”

수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비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작은 나비들은 모두 모양과 색깔이 달랐다. 나비 떼에 둘러싸인 수리가 노인을 찾으려 했지만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책은 거칠었다. 수리가 책을 집어 들고 그 첫 장을 펼쳤다. 그러자 지금껏 하늘을 날아다니던 모든 나비들이 그 책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수리가 책을 닫았다. 이제 세상에 나비는 한 마리도 없었다. 다시 책을 열었다. 나비는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나비는 책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책 속에서만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었다. 그리고 나비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책은 52장이었다.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부른 노래를 이 나비들이 부르게 될 거다.”

그들이 다시 걸어 360㎞ 정도의 하얀 모래톱을 지나 도착한 곳은 지브롤터 해안이었다. 그들이 동경 12.5도와 남위 17.5도의 언덕을 떠난 지 5000년쯤 되었을 때였다.

해안 절벽은 지중해 쪽에 있었다. 높이가 500m, 폭은 900m 길이는 2㎞에 달하는 커다란 바위 절벽이었다. 로즈마리와 백리향 향기가 코를 찔렀다. 수리와 라파누이는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기에 코를 킁킁거렸다. 코르크나무와 남지중해 소나무 등 나무들이 빽빽했고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에는 아스파라거스가 지천이었다. 절벽 제일 높은 꼭대기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빨간 머리 독수리였다.

석회암 동굴 안에는 오래된 탄내가 남아 있었다. 음식을 불로 익혀 먹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창끝 날과 긁개, 돌고래 뼈와 홍합 껍질 그리고 쪼개진 바다표범 두개골이 있었다. 수리는 근처에서 유골 더미를 발견했다. 라파누이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자들의 유골이었다. 유골 옆에는 투척 창도 있었고 토끼 가죽도 있었다.

수리는 이 동굴에 살던 자들이 이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해안으로 나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어디론가 가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했다. 어디를 가려고 이곳까지 먼 길을 왔던 것일까?

수리는 난로의 흔적을 따라 동굴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 보았다. 원형 동굴이 나타났다. 원형 동굴의 천장과 벽면에는 그림이 가득 차 있었다.

“앗!”

수리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동굴의 그림에 바로 수리와 라파누이가 있었다. 그림을 그린 자들은 이미 수리와 라파누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그린 것이다. 실패한 희망을 그린 것이다.

수리는 난로의 찌꺼기인 붉은 흙으로 벽에 자신의 손자국을 찍었다.

선명하게 찍었다.

“내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이곳은 고람동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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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 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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