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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선영의 노벨상 이야기

데이비드 볼티모어 -과학 리더십의 본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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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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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우리나라에서 과학을 하다보면 좋은 리더십이 아쉬울 때가 많다. 리더쉽이란 작게는 학과장이나 학장에서부터 크게는 총장과 장관 등을 의미한다. 과학 분야에서 리더가 되려면 좋은 과학인이면서 동시에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있어야 성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 정책, 교육 등 다방면에서 리더로 활동하며 미국 과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데이비드 볼티모어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볼티모어는 고등학교 재학 중 잭슨랩이 개최한 여름학교에서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명문 스와스모어 대학을 나와, 1964년 26세의 나이에 록펠러 대학에서 박사를 받으면서 이미 자신만만한 태도와 총명함으로 명성을 날렸다. 1965년, 나중에 함께 노벨상을 타게 될 레나토 둘베코(당시 51세)가 볼티모어를 캘리포니아의 썰크 연구소로 영입했고, 1968년에는 다음 해에 노벨상을 타게 될 MIT의 살바도르 루리아(당시 56세)가 그를 부교수로 데려갔다. 당대의 최고 과학자들이 20대 중반인 볼티모어의 능력을 일찌감치 인정한 것이다. MIT에 온지 불과 2년 후인 1970년, 그는 RSV라는 바이러스로부터 역전사효소를 분리하며, 유전정보는 DNA에서 RNA 방향으로만 전달된다고 했던 ‘센트럴 도그마’를 깬다. 그리고 발표 후 불과 5년 만에 37세의 나이로 노벨상을 받는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는 과학적 성과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볼티모어는 그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발견들을 했다. 예를 들면 인체의 염증반응에 핵심 역할을 하는 NF-κB의 발견, 항체 유전자의 재배열에 관여하는 RAG 단백질 분리, 항암제로 유명한 글리벡 개발의 기반에 된 bcr-abl 융합단백질 등이다. 승승장구라는 표현이 적합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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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에드윈 잭 화이트헤드라는 미국의 거부로부터 수천만 달러를 기부 받아 연구소를 세우는데, 그 모델이 전통적인 대학 연구소의 개념과 달라 MIT 교수들의 반대가 거셌다. 그는 회유와 압박을 동시에 구사하여 마침내 '화이트헤드 연구소'를 설립하고 단숨에 미국 최고의 생명과학연구소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로버트 와인버그, 제럴드 핑크, 루돌프 예니쉬, 하비 로디쉬 등 쟁쟁한 연구자들을 영입하며, 동시에 뛰어난 젊은이들을 데려왔다. 이 중에는 추후 머크 연구부문 사장이 된 한국계 미국인 피터 킴,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에릭 랜더, 인체 유전학의 대가인 데이비드 페이지, 유전자치료 개발에 공을 세운 리처드 멀리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볼티모어의 뛰어난 관리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혜안이 보이는 성과이다.

1990년 볼티모어는 록펠러 대학의 총장으로 영입되었다. 이 대학은 60년대까지는 세계 최고의 생명과학 연구기관이었으나, 보수와 권위에 뿌리를 둔 유럽식 대학문화로 인해 그 명성이 떨어져가던 때였다. 부임 후 그는 교수 관리에 개혁을 시작하며 특히 주니어 교수들의 지위를 크게 상승시키니, 기득권을 가진 교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볼티모어는 MIT의 동료 교수였던 이마니쉬 카리의 논문에 공동저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데이터 조작 시비에 휘말려 있었는데, 일부 반(反)볼티모어 세력들이 이를 이용하여 총장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볼티모어는 1년 반 만에 총장직을 사임하고 1994년에 MIT의 석좌교수로 돌아갔다. 1996년 미국 정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는 정밀조사를 통해 그간 있었던 19개의 고발항목 모두가 근거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과학자에게 주는 국가 최고의 훈장인 국가 사이언스 메달(US National Medal of Science)을 그에게 수여했다. 또한 록펠러 대학은 2004년에 그 대학 최고의 영예로 알려져 있는 명예 과학박사 (Doctor of Science) 학위를 볼티모어에게 주면서 용서를 구했다. ‘이마니쉬 카리 케이스’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문성이 없는 국회의원의 과도한 개입과 명성을 얻으려는 외부인의 감찰 행위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로서 많은 기사와 논문, 책이 나왔을 정도로 미국 과학계를 뒤흔들었다.

1997년 볼티모어는 서부의 MIT로 불리는 칼텍의 총장으로 가서 9년을 재직하면서 많은 성과를 냈다. 칼텍 설립 후에 물리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총장이 된 첫 경우이다. 그의 임기 동안 칼텍은 1조원이 넘는 기부금을 확보했고, NASA와 공동 운영하는 제트추진실험실(JPL)은 ‘화성탐사 로버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그는 병원 구입, 건물 신축, 여성 인력 증가, 학부생 지원 등 총장으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볼티모어는 미국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전공학 기술의 위험성을 과학인 스스로 공개하고 토론한 1975년 아실로마 회의에서의 역할, 1986년 에이즈 국가전략 위원회 공동위원장 역임과 에이즈대처 백서 발표, 인간게놈 프로젝트 방향 제시, 1996년 에이즈백신연구 위원회 위원장 등에 이어 최근에는 줄기세포와 유전자편집 기술 등 중요 정책과 사회 이슈들에 대해 활발하게 관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벤처기업을 여러 개 설립했는데 이 중 3개는 상장되었고, 암젠과 같은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사외이사, 바이오 분야 자금운용사의 자문은 물론 파트너 역할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뛰어난 연구자이고, 노련함이 입증된 행정가이며, 벤처 활동에서도 크게 성공한 과학인이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리더쉽이 우리 과학계를 이끈다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를 풀고,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발전이냐 답보냐의 기로에 서있는 우리나라에도 그런 현자가 출현하길 기대해 본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