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9) 제82화 출판의 길 40년 (32)|대동인쇄 주식회사

중앙일보

입력 1985.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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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이 경영했던 활판인쇄업계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1920년에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설립된데 이어 박문서관·영창서관·덕여서림등이 종로로 진출, 얘기책 출판으로부터 신문학 출판으로 그 영역을 점차 확대시키면서 기업으로서의 출판업을 확고히 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출판업자들은 같은 해인 1920년 공동출자로 YMCA 뒷골목안에 대동인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여기에 참여한 출판인은 심우택(계문사)지송욱(신구서림) 노익형 (박문서관) 홍정필 (?문관) 고유상 (회동서관)등이었다.
출판업자들이 출자하여 공동으로 인쇄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 시절에는 출판사들 사이에 독창적인 기획물의 경쟁이나 출판기획상의 기밀 보장 따위는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대동인쇄소의 시설은 모두 활판으로 46전지와 57전지를 여러대 구비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주로 회동서관·영창서관등이 발행하는 고대소설이나 신소설들이 인쇄됐다.
이 인쇄소는 해방되면서 박문인쇄소로 바뀌었으니 일제하 조선인이 경영하던 활판인쇄소로는 30년이라는 가장 긴 수명의 인쇄소로 기록된다.
그 무렵 또다른 인쇄소로 창문사가 있었다. 창문사는 윤치호(기독교서회 심사위원), 김홍규(독립선언문 인쇄사건으로 1년간 복역했던 보성사공장장으로 3·1운동 지도자 48인중의 한분), 구자혁등 세 사람이 오공골 (현 신문로 경기여고 부근) 에 설립한 인쇄소였다. 57전지 10대와 46전지 1대를 보유하면서 성서를 전문으로 인쇄했는데, 창설된지 4∼5년만에 뜻밖의 화재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된다. 불타고 남은 인쇄시설은 종로3가에 있던 광성인쇄소로 넘어갔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출판인들의 공동출자로 인쇄소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지 않았던 한성도서도 뒤질세라 자가 인쇄시설을 들여놓는다. 57전지 3대가 그것.
그 무렵 YMCA회관에도 인쇄부가 설치됐다. 월남 이상재선생이 이 인쇄부를 주관하면서 주로 영자 인쇄물을 찍어냈다.
1925년 박흥식 (현 화신산업회장) 이 명동의 동순태 건물(당시에는 일본인 거류지였던 현 유네스코회관 옆 골목에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한쪽을 빌어 선광인쇄소를 차렸다. 한편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이근택이 수하정4번지 (현 수하동)에 평화당인쇄소를 설립했는데, 얼마후 이 두 인쇄소는 합병하여 법인체인 선광인쇄주식회사로 발족, 수송동27번지 (현 한국일보사 부근) 의 새 사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장에 이근택, 전무에 조진주가 취임했다. 46전지 1대와 57전지 16대등을 갖춘 짜임새 있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업자로서는 유일하게 관청 출입업자 등록을 얻었다. 『한국인쇄대감』 에 따르면 한때는 안재홍의 조선일보, 서만식의 조선중앙일보를 인쇄하여 신문 발행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후 박흥식은 용지 공급업체인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 일에 전력하기 위하여 인쇄소 일의 일선에서 물러 앉게 되고 다시 얼마후 화신백화점 경영에 손대면서 선광인쇄소는 결국 해체된다.
이곳의 시설들은 조진주에게 넙어가고 이근택은 전의 평화당인쇄소를 다시 재건한다.
선광인쇄는 그후 오현준·주정순, 그리고 일본인 주정의 손을 거쳐 해방후에는 김시택이 인수, 운영했다.
해방 초기에 선광인쇄가 도서인쇄에 많은 공헌을 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시설이 워낙 노후하여 오래가지 못하고 문닫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평화당을 설립한 이근택이 인쇄업계에 투신한 것은 1921년 사리원에서였다. 서울아닌 지방으로서는 보기드물게 연판시설까지 갖추고서 대서용지등을 제작, 전국을 대상으로 판매했다고 한다. 이 인쇄소는 오늘날 제2대인 이일수에게로 이어져 외주전문의 최신시설과 뛰어난 기술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인쇄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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