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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⑬ 불과 물이 빚어낸 신비의 땅, 미바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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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분화구

얼음의 땅(Iceland)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아이슬란드 하면 흔히 빙하, 추운 날씨처럼 차가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땅이다. 국토 대부분이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되었고 섬 전체에 분포한 화산이 140개에 이른다. 그 중 무려 30개는 활화산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얀 연기를 뿜으며 새근대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불같은 면모를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섬 북부에 있는 ‘미바튼(Myvatn)’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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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바튼은 크라플라(Krafla) 화산 근처에 있는 호수를 일컫는 동시에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쓰인다. 미바튼 호수는 화산 폭발로 생겨났는데 용암과 물이 만나면서 주변부가 독특한 화산지형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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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바튼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괴상한 풍경이 시선을 잡아챘다. 흡사 가운데가 뻥 뚫린 대형 도너츠가 대지와 호수 위에 널려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화산 분화구 같기도 하고 언뜻 제주의 오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는 키가 작고 생김새가 간결했다. 안내판을 보니 명칭은 스쿠투스타다기가르(Skutustadagigar), 이름도 생소한 ‘유사 분화구’였다. 끓는 용암이 호수나 습지 등과 교차할 때 발생하는 수증기가 용암 표면을 뚫고 분출되면서 분화구와 유사한 지형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증기 폭발에 의해 생긴 ‘가짜 분화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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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투스타다기가르와 미바튼 호수의 생태계를 둘러볼 수 있는 몇 가지 산책 코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참외 배꼽처럼 튀어나온 분화구 주변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걸었다. 화산 지형에 별다른 지식은 없어도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땅을 거니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여러 개의 분화구 중 입장이 허용된 분화구 꼭대기에 올랐다. 그리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해 오르기가 수월했다.

정상에 서자 주변 전경과 호수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은 분화구가 호수 반대편까지 넓게 퍼져있었다. 미바튼 호수는 잔잔했다. 수천 년 전, 이곳에 팔팔 끓는 용암이 흘러들고, 굉음을 내며 폭발했을 모습이 감히 상상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1시간 반 정도 흘렀다. 되돌아 나가려는데 메에~ 하는 양 울음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뿔을 가진 양이 얕고 긴 능선을 걸어 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양 천지였다. 가짜 분화구에서 노니는 양떼라니. 한 폭의 초현실적인 그림을 보는 듯했다. 잊지 못할 풍경을 또 하나 품은 채 이곳을 떠났다.

어둠의 도시

미바튼에 오면 반드시 가리라 굳게 다짐한 곳이 있다. 온갖 모양의 화산동굴과 기암괴석이 숲을 이룬다는 딤무보르기르(Dimmuborgir)다. 다크시티(Dark Cities), 즉 어둠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는 이름만큼이나 흥미로운 전설이 얽혀있다. 천국에서 추방된 사탄이 내려와 거대한 지옥 묘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딤무보르기르란다. 왠지 땅 밑에 온통 검은 빛의 거대도시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주변 풍경은 스산했다. 때마침 날씨도 흐린 탓에 긴장감이 한껏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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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무보르기르를 탐험하는 코스는 30분짜리부터 2시간짜리까지 다양했다. 탐방로에 들어서자 양옆으로 수많은 용암 바위가 기묘한 자세를 취한 채 드라마틱하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 한순간에 돌로 굳은 듯 거칠고 생생했다. 독특한 모양의 용암동굴과 기둥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어떤 것은 튜브처럼 가운데가 뻥 뚫려있고, 두꺼비집처럼 속이 텅텅 비어있었는 것도 있었다. 성인 두세 명은 너끈히 들어갈 크기였다.

먼 옛날, 이곳은 습지였다. 그러나 2000년 전 발생한 화산 폭발로 흘러온 용암이 습지를 가득 뒤덮었다. 용암의 표면은 서서히 식어 굳었지만 그 밑에는 여전히 물이 남아 있을 터. 하부에서 뜨겁게 데워진 물은 수증기를 생성하며 굳은 용암 표면에 구멍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새로운 용암이 통과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렇게 독특하고도 기괴한 장소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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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보랏빛 가시나무가 뒤엉켜 있는 탐방로를 천천히 걸었다. 이리저리 바위와 동굴을 구경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암흑도시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등골이 오싹해져 서둘러 탐방로를 빠져나왔다. 입구 근처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딤무보르기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락없이 사탄에게 점령당해 새까맣게 바래버린 도시의 모습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도시가 점차 검은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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