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팔아 빚 갚는 게 낫다” “사업 재기할 수 있다” 매일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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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환 파산관리위원장(가운데)이 8일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서 진행된 전자부품 제조업체 C사의 ‘회계법인 사전보고’ 석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는 법정관리 중인 기업에 사업을 계속할 기회를 줄지, 현재 자산을 처분해 빚을 갚도록 할지를 판단한다. [사진 박종근 기자]

중년의 여성 사업가 A씨(45)는 지난해 3월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회생 신청을 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했다”는 A씨는 15년 전부터 소매점에 떡 재료와 밑반죽을 공급하는 도매업을 해왔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수입한 원재료의 불량으로 소송에 휘말리고 새로 구입한 기계에 하자까지 생기면서 기존 거래처들이 일거에 끊겼다. 빚 9억7000만원을 감당하지 못해 회생 신청을 한 것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파산관리위원’의 세계

이 신청 사건은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담당했다. 파산부 산하 파산관리위원회의 박기환(65) 위원장이 재판부와 함께 A씨 사업의 재무 상태를 검토한 결과 ‘청산가치’(처분 시 현재 가치)가 ‘계속가치’(영업을 지속할 때 가치)보다 6억원가량 컸다. 박 위원장이 “사업을 계속 하는 것보다 공장을 팔아 빚을 갚는 것이 낫다”고 얘기하자 A씨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사업을 계속 할 수 있다. 계산이 분명 잘못됐다”며 쉽사리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A씨가 낸 회생 신청은 같은 해 6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채무자와 판사 사이서 ‘산파’ 역할
부채 10억 넘는 개인·법인 ‘회생’ 맡아
“판사가 의사라면 관리위원은 간호사”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제3별관에 위치한 파산부 401호. 파산관리위원회가 있는 이곳에는 매일같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람들이 드나든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의 전체 파산·회생 건수는 3만6000여 건. 그중 법인과 부채 10억원을 넘는 개인 회생 사건(통칭 ‘일반회생’ 사건)은 지난해 765건에 달했다. 2006년 41건에 비해 12배 늘었다. 2006년 4월 ‘통합 도산법’(채무자 회생 및 파산법) 도입으로 회생제도가 보편화되면서 법원 문을 두드리는 자영업자와 중소상인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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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회생 사건을 전담하는 파산관리위원회는 중앙지법 파산부의 핵심 부서다. 일반회생은 개인회생과 달리 금융권 출신 전문관리위원들이 재판부와 회생 절차를 함께 진행한다. 음식점·개인병원 등의 자영업자부터 대한해운·동양·경남기업 등 법정관리를 신청한 대기업들의 생사여탈권 일부는 이들이 쥐고 있는 셈이다.

현재 파산관리위원장은 SC제일은행 기업여신 파트에서 25년간 근무하다가 2007년 특별채용된 박기환씨가 맡고 있다. 최장수 파산관리위원이기도 한 그의 ‘파산부 생활 9년’은 영세 사업자들의 삶의 애환에 관한 기록이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박 위원장을 지난 20일 만났다.

| 자수성가 사업가 회생 절차 힘들어해
회생 개시 직전에 목숨 끊은 사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 조언”

◆울고 매달리고 회생 신청 백태=“저희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회생 절차만 허락해주시면 사업은 꼭 살려보겠습니다.”

지난해 4월 회생 신청을 한 B씨는 ‘회생 절차 개시’를 앞두고 파산관리위원회에 출석해 담당 판사와 박 위원장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서울 양천구에서 음식점을 하던 B씨는 경기도에 분점을 내고 다른 사업에까지 손을 댔다가 11억원의 빚을 진 상태였다. 그는 전체 빚의 66%만 갚는 것으로 회생 계획이 인가됐다.

2012년 회생 절차를 밟은 약사 C씨는 채권자들 앞에서 회생 계획 보고서를 읽던 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 단계는 보고서를 낭독해야 절차가 완료된다. C씨는 뇌종양 투병을 하다 사망한 남편의 병원비를 대느라 약국 운영이 어려워졌다. 사채를 쓰면서 빚이 22억원으로 불어났고 아파트 전세 보증금까지 압류됐다. C씨가 보고서를 계속 읽지 못하자 담당 판사가 “제가 읽어도 되겠느냐”며 채권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신 읽어줬다고 한다. C씨는 회생 절차가 인가돼 빚이 36%(약 8억원) 정도로 줄었다. 2014년 3월 빚을 대부분 갚아 회생 절차를 조기 종결했다. 박 위원장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일수록 회생 신청과 절차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한 남성은 회생 개시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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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10억원이 넘는 개인들도 일반회생 신청 대상자다. 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D씨는 올해 초 회생 신청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 때 남편 사업이 실패하면서 생긴 빚이 20여 년 동안 12억원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남편은 D씨 명의로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빚을 갚지 않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D씨는 “공무원 신분 때문에 채권자들이 내게 강제 집행을 하려 한다”며 호소했다.

서울 명동에서 사채업을 하던 E씨는 다른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하다 2014년 회생 신청을 했다. E씨는 “채권자들이 ‘신체포기각서라도 써서 돈을 갚으라’고 협박한다. 회생 절차를 빨리 진행해달라”며 박 위원장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키코·메르스 사태 등 이슈 따라 휘청=박 위원장은 “중소기업은 매년 발생하는 사회적 이슈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기업 회생(법정관리)의 경우 회계 자료와 채무 관계가 복잡해 반드시 관리위원의 손을 한 번씩 거쳐 재판부로 자료가 넘어간다. 법정관리 기업이 회생 기간에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금융 거래를 하려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허가를 해주는 것도 관리위원 몫이다.

박 위원장에 따르면 2008년 무렵에는 환헤지 옵션 상품인 키코(KIKO) 피해를 본 중소기업들의 회생 신청이 많았다. 구제역 파동이 있었던 2010~2011년에는 축산·도축업체의 신청이 줄을 이었다. L화장품 업체는 지난해 ‘가짜 백수오’ 사태 직후 법정관리를 택했다. L사 대표는 “백수오 성분이 들어간 화장품을 출시한 이후 사건이 터져 홈쇼핑 방송이 무산되는 등 판매가 부진해졌다. 빚이 40억원 넘게 생겼다”고 털어놨다. 박 위원장은 “최근 홍삼 브랜드가 인기를 끌면서 한의원의 회생 신청이 한 달에 두세 건 접수된다”고 말했다. 재작년부터는 세월호·메르스 사태의 영향으로 각종 행사가 취소되면서 이벤트·기획 회사가 회생 절차를 밟는 경우가 많았다.

| 동양 등 대기업 법정관리도 도와
‘직장 잃지 않게 도와줘 고맙다’ 편지
“빚 지고도 살아나게 만드는 게 목표”

대기업 법정관리를 돕는 것도 파산관리위원회의 핵심 업무다. 2014년 법정관리를 신청한 쌍용건설의 김석준 대표는 쌍용건설을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목이 메어 제대로 보고서도 읽지 못했다고 한다. 박 위원장은 “동양 사태 때는 장충체육관을 빌려 채권자 집회를 할지 고민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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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동안 제도의 변화도 있었다. 관리위원들이 건건이 도장을 찍어줘야 했던 금융 거래 허가는 2012년부터 ‘포괄 허가제’로 바뀌었다. 지난해부터 악성 회생 브로커 체크리스트를 도입, 의심 사례는 관리위원이 재판부에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최근 부실채권을 사고파는 유동화 전문회사들이 채권자 집회에 부쩍 많이 나타난다. ‘배드 뱅크 산업’이 생겨났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의 보물 1호는 2013년 12월 “직장을 잃지 않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며 대한해운 직원이 보낸 편지다. 2011년 초 법정관리를 신청했던 대한해운은 2013년 11월 회생 절차를 조기 종결했다.

“파산부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죠. 이 말의 의미를 ‘빚지고도 살아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관리위원 6명 은행·회계사 경력 20~30년차 … 올해 3명 더 채용
회생 절차는 9~10단계로 복잡하다. 신청서 제출, 회생 개시 결정, 채무 조사, 회생 계획 인가 등으로 이어진다. 서울중앙지법 파산관리위원회에 상주하는 6명의 관리위원들은 매 단계마다 채무자와 재판부 사이에서 ‘산파’ 역할을 한다. 위원들 스스로 “판사가 의사라면 관리위원은 간호사”라고 말한다.

파산관리위원회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계기로 1998년 기업 도산 절차를 돕는 외부위원 3명을 채용하면서 발족됐다. 회사정리법·파산법·개인채무자 회생법을 합친 ‘통합 도산법’ 시행(2006년 4월)을 계기로 6명으로 늘어났다. 위원들의 임기는 3년이다.

현재 재직 중인 관리위원들은 모두 시중은행·회계사 경력 20~30년차다. 대부분 금융기관 간부 출신이다. STX팬오션·대한해운·동양그룹·경남기업 등 주요 법정관리 사건들은 파산관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됐다. 현재도 삼부토건과 해운업체 삼선로직스 등의 회생 절차가 진행 중이다. 김동일 관리위원은 “회생을 ‘종합 예술’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재판부를 대신해 채무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때도 있고 법률·회계 지식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일반회생 사건이 급격히 증가하자 올해 관리위원 3명을 신규 채용했다. 앞으로 9인 체제로 운영된다.

글=이유정·정혁준 기자 uuu@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