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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달러 새 얼굴에 흑인 여성노예···유격대 끌고 노예 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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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화폐는 가장 뛰어난 선전 매체다.” 정치 리더가 인간의 욕망과 국가의 권능을 상징하는 돈의 디자인을 통해 메시지를 퍼뜨리곤 해서 이런 말이 나왔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4세기에 돈의 이런 기능을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비슷한 일이 2000여 년이 흐른 뒤 미국에서 일어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달러의 도안을 바꾸기로 했다. 미 재무부는 “노예해방, 여성참정, 민권 운동가의 얼굴을 20·10·5 달러 지폐에 넣기로 했다”고 21일(현지시간) 발표했다.

필리포스 2세와 오바마의 정치적 처지는 닮았다.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사람들이 후진국으로 낮춰 봤던 마케도니아 왕이었다. 그는 이런 후진국을 고대 그리스의 핵심 국가로 발전시켰다. 그는 신흥 권력자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주화에 얼굴을 새겨 넣어 그리스 전역에 퍼뜨렸다.

오바마는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이다. 미국 사회에서 정치·경제·인종적으로 신흥 리더다. 그는 왕이 아니라 공화정 리더다. 그래서 자신의 얼굴을 새기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오바마가 ‘다문화·다인종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의 모습을 달러에 넣기로 했다”고 전했다.

| 남부 농장 습격해 노예 해방시켜
현재 앞면에 있는 잭슨 7대 대통령
노예제 옹호 경력, 뒷면으로 퇴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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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선택의 핵심은 20달러다. 20달러는 1달러, 100달러 지폐 다음으로 많이 쓰는 돈이다. 오바마는 20달러 지폐 앞면에 앤드루 잭슨 7대 대통령 얼굴 대신 노예해방 운동가인 해리엇 터브먼이란 흑인 여성의 얼굴을 넣기로 했다. 터브먼은 1820년대에 노예로 태어나 노예해방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유격대를 이끌고 남부 농장을 습격해 노예를 해방시켰다. 잭슨 전 대통령의 얼굴은 화폐 뒷면으로 이동한다.

잭슨은 민주공화파의 대표주자였다. 19세기 말 이전까지는 남부 농장주를 대변했다. 노예해방 운동가와는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또 잭슨은 인디언을 탄압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사적인 측면에서 잭슨은 반(反)중앙은행주의자였다. 중앙은행이 농민의 이익을 뺏어 간다고 생각했다. 연방파의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은 친(親)중앙은행주의자였다. 연방파들은 국가 부채를 해결하고 표준통화를 만들기 위해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차 중앙은행인 합중국은행은 1791년 설립돼 1811년 폐지됐다. 이후 1816년에 2차 합중국은행이 설립됐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잭슨이 1836년 폐지했다. 현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1913년에야 설립됐다. 70여 년 동안 미국은 통화정책 측면에선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잭슨은 미 금융계 인사들이 보기에는 달러의 얼굴로서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 5달러 뒷면 마틴 루서 킹 등 3명
10달러 뒤엔 여성운동가 5명
이르면 2020년 새 지폐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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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5·10달러 도안에도 손댔다. 10달러 뒷면에 수전 앤서니, 엘리자베스 스탠턴 등 19세기 여성참정 운동가 5명의 얼굴을 넣기로 했다. 5달러 뒷면엔 20세기 민권 운동가 얼굴을 새기기로 했다. 메리언 앤더슨(흑인 여가수 겸 민권 운동가), 엘리너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부인),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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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끝에 10달러 얼굴로는 알렉산더 해밀턴을 유지하기로 결정됐다. 오바마는 내부적으로 해밀턴 얼굴을 없애는 방안도 검토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월가 등 금융권의 반발이 거셌다”고 전했다. 해밀턴이 초대 재무장관으로 연방정부 재정과 달러의 기초를 다져서다.

이번 달러 디자인 교체는 오바마의 임기가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결정됐다. 오바마는 임기 말에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화폐를 통해 퍼뜨리는 방법을 택했다. 새 달러는 이르면 2020년부터 발행될 예정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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