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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곽희수의 단편 도시] 난지 캠핑장에 한강의 낭만을 허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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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익숙한 한강의 풍경. 정체된 차량의 행렬과 앞서가는 차의 뒤꽁무니가 보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의 낭만은 밀리는 차 안에서 실종된다. 그런데 순간, 한강변 방음벽 사이로 한강 난지 캠핑장이 보인다. 마치 공룡의 비늘처럼 번쩍인다. 난지 캠핑장에선 강과 도시의 경계, 휴일과 평일의 경계가 무너진다. 사람들은 무너진 경계 위에서 부산하게 일렁인다. 익숙한 도시를 낯설게, 또 설레게 하는 강변의 풍경이다. 

장소의 낭만은 주변 환경이 만들어
강을 활용 못하면 산속과 같은 공간
스탠드로 캠핑장 바닥 높이는 방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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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 캠핑장은 시민들이 소소한 여가 생활을 즐기는 공간이다. 한강변에 있는 거대한 마당이랄까. 하지만 난지 캠핑장에서는 한강이 보이지 않는다. 한강변에 있지만 산속 캠핑장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아래 원 안) 건축가 곽희수가 이곳에 스탠드를 설치해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캠핑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를 스케치로 표현했다.(위 스케치)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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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달력은 국가 대소사의 기준이었다. 달력의 발명으로 인해 농부들은 농한기와 농번기를 보다 쉽게 구분하게 됐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를 기록할 수 있었다. 시간을 통제하는 도구로 모든 분야에 두루 유용하게 사용됐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달력은 개인의 일상까지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노동과 휴식은 달력에 있는 날짜와 색깔로 규정된다. ‘검은 날’은 일터로 가고 ‘빨간 날’에는 다 같이 논다. 노는 날과 일하는 날은 달력에 따라 집단화됐다. 개인의 일상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행동 지침을 달력이 제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가 기간 중 집에서만 머무는 ‘한국형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족’의 출현도 집단화된 휴가의 영향이다. 경기 침체도 한 가지 이유지만 한국형 스테이케이션이 등장한 가장 큰 이유는 휴가철 과밀과 교통 체증 때문이다. 이들은 휴가 기간 내내 집에서 이웃들이 휴가지로 떠나 텅 빈 동네를 독차지하며 보낸다. 동일한 시간대를 집단적으로 이용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붐비는 휴가지를 거부하는 이들은 어디서 휴가를 누려야 할까. 나는 이 답을 한강 난지 캠핑장에서 발견한다. 이곳은 평일에도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2002년 개장한 난지 캠핑장의 연평균 이용자는 10만 명이 넘는다. 평일에 이곳에 온 사람 중엔 퇴근 후 모여서 다음 날 출근 전까지 고기를 굽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캠핑하며 노는 경우도 있다. 평일을 휴일처럼 즐기는 사람들이다.

 
강이 보이지 않는 캠핑장

한강 난지 캠핑장은 한 권으로 쓰인 서로 다른 두 편의 소설이다. 한 편은 한강르네상스 개발 사업의 한 단락을 구성하는 거대 담론이고, 다른 한 편은 시민들이 소소한 여가 생활을 보내는 마당에 대한 이야기다. 한강 난지 캠핑장은 볼거리로 채워진 한강르네상스 사업 지도에서 유일하게 비워 놓은 공간이다.

한강변에 이렇게 거대한 마당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강변북로를 등지고 어렵게 만들어낸 마당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해 질 무렵 한강변 난지 캠핑장에선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강의 일몰은 연기 사이로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은 고기 굽기에 여념이 없고, 캠핑 놀이에는 석양이 번지는 강변의 낭만이 빠져 있다. 고기를 굽고 야영을 하는 게 시민들의 각박한 생활에 큰 위안이 된다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여기가 강변이라는 점이다. 강을 즐기지 못한다면 여느 산속의 유원지와 별반 차이가 없다. 개인의 시간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캠핑과 강을 동시에 즐길 방법은 없을까.

난지 캠핑장과 비슷한 시기에 개장한 파리 플라쥬(Paris Plage)는 3.5km에 이르는 센강변에 1000여t의 모래를 깔아 시민들에게 강변의 낭만을 선사한다. 플라쥬는 경제 사정이 열악한 도시민과 바쁜 도시 생활로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는 시민들의 애환을 고민한 파리 시장 베르트랑 들라노에(Bertrand Delanoё)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휴가철 문을 닫는 상점과 공공시설로 인해 파리를 방문한 관광객의 불편까지 해소한다. 강변에선 해변 스포츠와 일광욕, 각종 문화 행사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열려 시민과 관광객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인상서호’는 중국 항저우 서호(西湖)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초대형 수상 쇼다. 장이머우 감독은 서호에 수상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중국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 ‘백사전’을 올린다. 호수를 무대 삼아 물 위를 걸으며 연기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중국 계림의 ‘인상유삼저’(印像劉三姐)는 그 무대가 계림의 호수다. 자연을 고스란히 무대장치로 변용한 장이머우의 천재성도 대단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정부의 도움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인상서호가 주는 감동은 자연을 노래하고 즐김으로써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낭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영국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밀레니엄 브리지에서 만나는 석양은 아름답다. 활기차게 날개를 저어가는 갈매기를 보면서 차를 마시는 것은 시민들에게 큰 호사다.

강의 폭과 감동이 비례한다면 한강의 잠재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다. 플라쥬가 있는 센강의 퐁네프 다리(232m)와 템스강의 밀레니엄 브리지(325m)는 난지 캠핑장 인근 가양대교(1700m)의 6분의 1 길이에 불과하다. 강폭만으로 낙조의 감동을 환산한다면 폴라쥬 여섯 개를 모아놓은 것과 맞먹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조건을 활용하지 못한다. 난지 캠핑장에서는 한강이 보이지 않는다. 조야한 몽골식 텐트와 고기 굽는 연기에 가로막혀 강을 들끓게 하는 석양의 낭만을 만날 수 없다.

 
낭만 공간이 돼야 할 한강

우리는 한강변에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 시민 캠프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강을 이용하지 못하는 시민 캠프장은 글램핑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장소의 낭만은 자연이 준다. 우리가 흔히 길에서 접하는 노상 카페도 거리의 낭만을 매개로 하지 않던가.

강변에 차려진 텐트라면 당연히 강을 관람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강르네상스를 경제적 논리가 아닌 강변 낭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어떨까.

난지 캠핑장에서 강변의 석양을 감상하려면 건축적으로 높이를 주면 된다. 지면에 스탠드를 만들고 그 위에 텐트를 칠 수 있다면 캠핑을 하며 한강을 관람할 수 있다.

건축은 치수와 척도로 장소에 아름다움과 낭만을 담는 작업이다. 스포츠 경기장 스탠드와 로마의 콜로세움은 방해 없이 피사체를 바라볼 수 있는 높이를 이용한 건축 기법이다. 이 기법을 활용해 난지 캠핑장에 있는 텐트의 바닥을 1m만 올리면 시간과 계절에 따른 한강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다.<스케치 참조> 텐트를 접으면 결혼식, 음악회, 각종 관람에 관련된 프로그램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강변 난지 캠핑에선 강을 바라볼 수 없는 건 강과 텐트가 있는 구역의 높이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인 자연을 개발과 정치 논리로만 봐선 안 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문명에서 잃어버린 자연의 모습을 되찾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는 자연의 원형을 바라보는 낭만이 있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물에 비친 달에 취해 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자연은 개발할 대상이 아니라 노래해야 할 대상이다.

한강이 흐르는 한 서울에 사는 이들은 달력으로 개인의 휴일과 평일을 정할 필요가 없다. 한강은 저마다의 낭만으로 기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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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곽희수(49)는 루트하우스(원빈 집), 테티스(고소영 빌딩)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모켄(MOKEN) 펜션 등으로 대중과 친숙한 건축가이다. 현재 이뎀도시건축 대표다. 서울시건축상·한국공간문화대상·한국건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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