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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쾌락의 탄환에 실린 인간성은 어디로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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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호 30면

‘국물 있사옵니다’

‘게임’

여기 두 편의 연극이 있다. 1966년 초연된 해묵은 우리 연극과 올해 국내 초연되는 영국 작가의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무려 50년 세월을 뛰어넘어 2016년 서울 무대에 함께 오른 국립극단의 ‘국물 있사옵니다(이하 국물)’와 두산인문극장의은 급변하는 사회 속 흔들리는 인간성의 문제를 화두로 던진다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 있다. ‘국물’이 아직은 훈훈했던 60년대 초기 산업화 시대에 현대인들의 출세주의와 배금주의에 찌든 삶을 예견했다면,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절정에 접어든 지금, 곧 닥쳐올 근미래의 어떤 삶을 예견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형식부터 눈길을 끈다. ‘국물’은 리얼리즘 연극 위주이던 60년대, 서사극과 부조리극의 문법과 블랙코미디 형식을 도입해 현대연극의 장을 연 이근삼 작가의 대표작이다. 주인공이 극을 넘나들며 해설자를 겸하는 것은 요즘도 보기드문 형식이다. 그 옛날 라디오 음향으로 ‘서울찬가’ ‘키다리 미스타김’ 등의 유행가가 흐르고, 당시 명랑만화에서 보았을 법한 장면들이 재연되는 ‘응답하라 1966’이지만, 그 안의 인간군상은 지금도 그대로다.


제철회사 임시사원으로 남을 배려하는 상식적인 삶을 살며 늘 손해만 보던 평범한 서른한 살 숫총각 김상범은 결혼할 여자를 대학교수인 형에게 빼앗기자 ‘옛 상식’을 버리고 ‘새 상식’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음모와 배신, 협박에 살인까지 저지르며 불과 몇 달 만에 정식사원, 경리과장을 거쳐 상무가 되고 과부인 사장 며느리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무대를 뒤덮은 욕망의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인지 내려가는 계단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행복감은 간데없고 정복감만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상범의 처지는 ‘로맨틱해 보이지만 감상적이고,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부조리 자체다. 성장 논리로 치닫는 폭주 기관차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이 결국 희생될 것임을 그 옛날 연극은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희곡의 원래 제목이기도 했던 ?엽총?의 존재다. 상범이 늘 손질하는 사장의 엽총은 욕망을 상징한다. 가끔 사장과 며느리를 겨누는 것은 욕망의 대상을 포착하는 행위다. 하지만 그의 둘째 형이 엽총 오발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맹목적인 욕망의 슬픈 결말을 암시한다. 욕망하던 모든 걸 가졌지만 엔딩에서 여전히 엽총을 들고 선 상범은 과연 무엇을 겨누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50년의 세월을 건너뛴의 무대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황소(Bull)’(2013) 등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의 비인간화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 마이크 바틀렛의 작품이다. ‘국물’의 상범이 ‘새 상식’으로 택한 출세·배금주의가 너무도 당연한 삶의 전제가 되어버린 현대 이후의 사회에선 더욱 기상천외한 ‘새 상식’이 등장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으로 사생활 노출과 관음증이 보편화된 결과 인간의 삶 자체를 게임처럼 소비하는 세기말적 쾌락지상주의다.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고안한 신종 게임의 콘텐트가 되기로 계약한 가난한 부부는 집을 얻는 대가로 사생활을 포기한다. 게이머들은 노래방 같은 공간에서 화면 속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보다 중요한 순간에 마취약이 든 엽총을 쏘아 ‘의사 살인’을 함으로써 쾌락을 완수한다. 이 ‘인간 사냥’ 게임이 벌어지는 무대를 둘러싼 객석의 우리도 연극의 관객인 동시에 게이머가 된다.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은 극중 게이머들을 비추기도 하고 게임 화면이 되기도 하면서 이 게임의 진짜 참여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무대에선 ‘상식’이 점점 사라진다. 물질을 위해 스스로 사냥감이 되길 택한 부부는 곧 아이마저 제물로 내놓고, 아무 가책 없이 부부의 소중한 순간을 사냥하던 게이머들은 그 또한 따분해지자 아이에게 총구를 겨눈다. 최소한의 도덕성을 담보하던 게임의 룰도 갈수록 느슨해지고, 발사된 탄환과 함께 상식도 인간성도 산산이 파열된다. 지불한 돈만큼 쾌락을 누릴 권리를 부여하는 정글 자본주의의 끝판이다. 그나마 상식적인 것은 게임을 고안한 사업가가 파산을 맞는 결말이다. 경쟁자들의 더 자극적인 아이디어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게임의 끝엔 결국 관찰자만 남았다. 8년 내내 게임을 지켜보며 이 사냥을 가이드한 관리인이다. 부부의 삶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게이머들의 비위를 맞추던 평범한 그 또한 바로 우리들이다. 그런데 엔딩에 그의 총구가 겨냥한 것은 자기자신이다. 정글 같은 자본주의 게임의 끝에, 욕망의 대상을 겨누던 총구는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되는 걸까. 연극이 예견한 미래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슬픈 게임은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단·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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