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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현대미술 가져왔으면 우리말로 풀어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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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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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부터 홍익대 박물관장을 맡은 전영백 교수.

전영백(51)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미술사를 공부하게 된 여정을 운명으로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키운 화가의 꿈을 접고 연세대 사회학과로 진학한 배경에는 사회학자였던 아버지의 소망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미술사로 방향을 튼 계기에는 화가였던 어머니로부터의 피내림이 작용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론과 실기의 절묘한 결합으로 그는 공부가 신나고 행복한 희귀한 연구자다.

『코끼리의 방』 펴낸 전영백 교수
공간미술의 거장 10명 해석
“문화번역 제대로 해야 오해 안 생겨”

“두 분의 욕구 사이에서 제 전공이 자연스럽게 싹텄어요. 사회학자의 훈련된 시각으로 미술사를 쫓아가니 더 잘 보이고, 화가의 본능으로 작품을 분석하니 저절로 느낌이 와요. 제 첫 책인 『세잔의 사과』는 미술을 언어로 표현하는 걸 일깨워주신 아버지께 헌정했어요. 이번 책은 현대미술의 시원이라 할 모성적 공간, 제 예술성의 모체인 어머니께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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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가 모친을 생각하며 펴낸 『코끼리의 방』(두성북스·사진)은 현대미술과 공간을 다루고 있다. 공간에 천착하는 거장 10명을 다섯 주제로 나눠 해석했다. ‘장소 특정성’의 리처드 세라·고든 마타 클락, ‘빛과 건축의 숭고’의 제임스 터렐·올라퍼 엘리아슨, ‘설치의 정치적 실천’의 도리스 살세도·아이웨이웨이, ‘집으로서의 건축’의 레이첼 화이트리드·서도호, ‘인체와 공간’의 아니쉬 카푸어·안토니 곰리다. 현대미술에서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절감했기에 공간이 곧 작품의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책 제목도 지었다.

“막연하게 현대미술이 어렵다고들 말하는 게 전 싫었어요. 미술사가는 독자와 관람객이 쉽게 읽고 알 수 있도록 현대미술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년을 꼬박 이 책에 매달리며 글 쓰는 건 기뻤는데 최신 도판을 구하고 그 저작권을 해결하는 게 난제였어요. 작가들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몇 달 가도록 e 메일에 회신이 없어요. 어떤 작가는 아시아 학자가 쓰는 책에 왜 내가 끼어야 하느냐며 백인 우월주의를 드러내기도 했고요.”

전 교수는 속을 끓이면서도 직접 작가 작업실을 찾아가거나 전속 화랑을 찾아 하나씩 매듭을 풀었다. 세계적 거장들 앞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들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어렵게 도판을 얻으면 독자들에게 선물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주체적 시각으로 21세기 가장 최신 미술 사조를 소개한다는 기쁨도 컸다.

“서구의 첨단 미술을 우리 땅으로 가져왔으면 우리 눈으로 이해하고, 우리말로 풀어야죠. 그게 문화번역입니다.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오해가 생기고 즐기지 못하는 거예요. 이럴 때 학부에서 사회학으로 기초를 다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해요.”

그는 다음 임무도 이미 정해놓았다고 했다. 최근 국제미술시장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는 단색화 등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 제대로 학문적 토대를 쌓고 국제학회에서 당당하게 공감을 얻는 논문을 발표하는 일이다. 부모님 두 분에게 바칠 전 교수의 다음 책이 눈에 선하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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