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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바로보는 북한] 남한손님 끌려고…북한식당 종업원 김일성배지 떼고 근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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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김일성이 남한 손님 이렇게 접대하라고 가르쳤느냐.” 평양산 봉화맥주를 따르던 북한 여종업원의 실수로 잔이 넘치자 70대로 보이는 서울 손님은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20대 초반의 종업원은 “아니 왜 수령님을 들먹이십네까”라고 항변했지만 홀을 가득 메운 한국 관광객의 기세에 눌렸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죠.

술·노래·춤 단란주점 형태로 발전
연 수입 115억원 ‘외화벌이 효자’

남한 정보 수집 거점역할 했지만
종업원들 한국 동경도 깊어진 듯

갈색 머리, 스키니진, 나이키 …
최근 탈북한 그녀들, 남한물 들어

1990년대 말 취재차 처음 찾았던 중국 옌지(延吉)의 북한 식당 금강원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초기엔 소소하게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백두산을 찾은 한국 관광객을 겨냥한 북한의 식당 마케팅은 대박을 냈습니다. 북한 사람을 만난다는 호기심에 가자미식해와 평양냉면 등을 맛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번졌기 때문인데요. 어떤 실향민 할아버지는 두고 온 딸 생각이 난다며 여종업원의 손에 작게 접은 100달러 지폐를 슬쩍 쥐여주기도 했는데요. 당시 4인 가족이 6개월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죠.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해외 북한 식당이 자리를 굳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베이징이나 옌지 등 중국 지역은 물론 캄보디아와 태국 등 동남아와 유럽까지 진출하면서 현재는 10여 개국 130여 개(통일부 추산) 에 이른다고 하는군요. 연간 1000만 달러(우리 돈 115억원)의 외화벌이를 해왔다고 하니 달러와 에너지·식량 등 3난(難)에 시달리는 북한 당국엔 효자 노릇을 한 셈입니다.

북한은 이런 북한 식당을 대남 공작원의 해외 거점이나 정보수집 창구로도 활용해 왔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입니다. 또 우리 기업의 주재원이나 관광객을 통해 남한 관련 정보를 챙기기도 했다는데요. 2011년에는 네팔에 진출한 북한 식당이 탈세혐의로 현지 당국의 압수수색을 받는 과정에서 컴퓨터에 저장된 우리 상사원이나 관광객의 신상정보와 녹음파일이 드러난 일도 있습니다. 북한으로선 해외 식당이 꿩 먹고 알도 먹을 수 있는 사업이었던 거죠.

식당 장사가 번창하자 북한 당국은 규모와 종업원 수를 늘리며 사업확장을 시도했습니다. 베이징·선양·단둥 등 중국 주요 도시에는 한 곳에 여러 개의 지점이 들어서기도 했죠. 이름도 해당화·류경·아리랑 등 다양해진 겁니다. 현지 호텔이나 대형 업체와 합작을 하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더 많은 달러를 벌어들이려 식당 외에 단란주점 형태의 업소에 손을 댄 것도 이때쯤입니다. 미모에 가창력까지 갖춘 여종업원들이 술을 따르고 손님과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추는 방식입니다. 여종업원들이 성형수술을 하고 한국 손님들이 거부감을 갖는 김일성 배지를 떼고 나선 것도 매출을 조금이라도 올려보려는 고육책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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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에 도착한 12명(30대 남성 지배인 한 명은 별도)의 여종업원들은 이런 해외 북한 식당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들은 정부 조사 과정에서 한결같이 한류(韓流)에 대한 동경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탈북 동기로 꼽았습니다. 남한 영화·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발전상을 알았다는 건데요. 무엇보다 22~25세인 이들이 남한 관광객을 가까이서 접하며 받았을 충격이 컷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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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당국이 제공한 이들의 경기도 시흥 합동신문소 도착 사진에는 이같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미니버스 2대에서 내린 여종업원들은 최신 유행의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는데요. 늘씬한 체구에 블랙과 버건디 색상의 스키니진은 서울의 또래 여성들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죠. 나이키 운동화와 헬로키티 가방에 백팩을 걸친 이들은 개성이 넘쳤습니다. 검은색이나 회색 단체복 차림이던 이전 집단 탈북자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죠. 갈색을 띤 생머리를 두고 정부 당국자는 “서울에 오기 위해 염색을 한 건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3명이 어떻게 집단 탈북을 감행했느냐는 궁금한 대목입니다. 한 명의 이탈자만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대북제재로 인한 경영난 때문’이란 정부 당국 설명은 “20대 여종업원들이 무슨 책임이 있길래 목숨을 건 탈북을 할까” 하는 의문을 낳습니다. 평양으로 돌아가면 단체로 가혹한 형벌을 면치 못할 엄청난 일이 이 식당에서 벌어진 걸까요. 탈북 퍼즐을 맞추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정부 합동신문조가 답을 내놓을 차례입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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