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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김은숙 드라마, 이러니 안 반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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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태양의 후예’(방영 중, KBS2, 이하 ‘태후’)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 로맨스 드라마의 신화로 불리고 있다. 지난 3월 28일 영국의 BBC는 “군인이 연애하는 드라마가 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SNS 웨이보에서 ‘태후’ 조회 수는 75억 건을 넘었다. 김은숙(43)·김원석(39) 작가가 공동 집필한 이 드라마의 인기 요인은 단연 주인공들의 로맨스다. 이는 ‘시크릿 가든’(2010~2011, SBS) ‘상속자들’(2013, SBS) 등 빠져드는 극본을 써 온 김은숙 작가의 공이 컸다. 달달하다 못해 오글거리는 대사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그때마다 시청률은 기세등등하게 올랐다. 그와 동시에 할리퀸 로맨스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이 뜨거운 반응은 ‘김은숙 드라마’가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다. 다소 허무맹랑하지만 열렬히 사랑받는 연애 이야기를 만든 그의 드라마 세계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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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ㅣ여성이 꿈꾸는 최고의 판타지


남자 군인이 병원에서 우연히 여의사를 만난다. 첫눈에 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군인은 의사에게 반한다. “의사면 ‘남친’ 없겠네요? 바빠서”라는 한마디로 둘 사이에 연애 감정이 생겨난다. ‘태후’ 1회 내용이다. ‘시크릿 가든’도 비슷했다. 재벌 3세 김주원(현빈)은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을 여배우로 착각해 만났다 호감을 느낀다. 그뿐인가. 이들은 몇 번에 걸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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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을 고백하고 또 고백한다. “그러니까 난 지금 그쪽한테 대놓고 매달리는 거야”라는 김주원의 말은 예사다. ‘태후’ 속 유시진(송중기) 대위도 그에 못지않다. 의사 강모연(송혜교)에게 자주 고백한다고 ‘고백봇(고백 로봇)’이라는 별명도 얻었으니까. 황미요조 영화평론가는 “김은숙 드라마의 특징은 여주인공이 감정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도 사랑받는다는 것이다. ‘썸’ 타고 ‘밀당’해야 상대 마음을 겨우 얻는 현실과는 반대”라고 말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생긴 남성이 나에게 고백하는 환상. 보통의 여자라면 한번쯤 꿈꿔 봤을 법한 사랑의 판타지 아니겠나. 이게 바로 김은숙 드라마의 기본 조건이다. 조민준 드라마평론가는 “남주인공은 사랑 앞에 거침없고,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기사로 그려진다”며 이것이 “시청자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라고 분석했다.

'태양의 후예'와 그의 전작들이 사랑받는 이유

여주인공은 남자의 맹목적 구애 앞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민한다. 황미요조 영화평론가는 “여주인공이 주체적으로 갈등하는 반면 남주인공은 ‘사랑꾼’으로 대상화돼 그려진다”고 말했다. 모연은 시진에게 끌리지만, 그가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특전사란 점이 마음에 걸린다. 반면 시진은 자신이 모연을 왜 좋아하는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듯 김은숙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들이 훨씬 쉽게 캐릭터에 감정 이입하도록 만들어진, 여성 시청자를 위한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다.

평단은 그동안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두고 ‘신데렐라 판타지’라고 비판했다. ‘파리의 연인’(2004, SBS)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등에서 재벌이 평범한 여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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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서다. 하지만 그게 김은숙 드라마의 전부는 아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여주인공의 계급 상승보다 남녀가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이 시청자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라고 분석한다. 뻔뻔할 만큼 달콤하게 들이대는 명대사가 인기를 끈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파리의 연인’ 한기주) 등이 대표적인 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남녀가 상대방 말꼬리를 잡듯 경쾌한 리듬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시청자가 넋 놓고 드라마를 챙겨 보게 하는 포인트이자 “김 작가만의 로맨틱 코미디 원천 기술”(조민준 드라마평론가)이다. ‘파리의 연인’ 57.4%, ‘시크릿 가든’ 35.2%, ‘상속자들’ 25.6% 등 폭발적인 최고 시청률(닐슨코리아 제공)은 그 전략이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ㅣ환상을 지탱하는 현실 인식


김은숙 작가가 판타지만큼이나 공들이는 건 현실 묘사다. 이는 ‘태후’에서 군대와 재난 상황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남녀 주인공의 계급적·직업적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지에 집중한다. 사랑 타령만 줄기차게 했다면 아마도 그 많은 드라마가 줄줄이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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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중앙포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재벌 3세가 자존감 높은 가난한 여성을 사랑할 때,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특전사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를 사랑할 때 갈등은 발생한다. 그때마다 김은숙 작가는 그 문제들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앞서 말했듯 ‘시크릿 가든’의 두 주인공은 계급 차이로 대립한다. “어떤 사람이 1년에 1억을 쓸 수 있느냐”고 묻는 길라임에 김주원은 이렇게 답한다. “그들이 1억을 쓰면서 원하는 건 딱 두 가지야. 불평등과 차별. 군림하고 지배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철저히 차별받기를 원한다고.” ‘태후’ 초반, 시진과 모연은 처음 만나 ‘썸을 타다’ 금세 헤어진다. 시진은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연은 “의사에게 생명을 뛰어넘는 가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공감할 만한 인물들의 가치관과 신념 차이를 정확히 짚어낼 때 판타지의 공허함은 상쇄된다. 정치인 조국(차승원)과 10급 공무원 신미래(김선아)의 사랑 이야기 ‘시티홀’(2009, SBS)도 비슷하다. 조국은 “정치는 돈으로 하는 것”이라 말하는 반면, 미래는 “못 사는 사람을 잘 살게, 잘 사는 사람은 베풀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반박한다. 조민준 드라마평론가는 “판타지가 딛고 있는 현실적 기반을 성실히 표현하는 게 성공한 로맨스 드라마, 특히 김은숙 드라마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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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작가. 사진 이호영 기자

실제 김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밝힌 바 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 생활에 뛰어들었고, 20대 중반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월세 30만원짜리 방에서 살았다. 신경숙 작가를 좋아하며 소설가를 꿈꿨으나 번번이 신춘문예에 낙방하기도 했다. 70만원 준다는 말에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그는 두 번째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성공으로 스타 작가가 됐다. 그는 가난이라는 가혹한 현실과 단숨에 삶이 180도 바뀌는 드라마틱한 순간 모두를 겪었다. 판타지는 완벽하게 설계하고, 현실은 적나라하게 꼬집는 자신의 드라마처럼 말이다.


ㅣ달라진 김은숙 월드, 그래도 결론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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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품격[중앙포토]

김은숙 작가 스스로 “해피 엔딩을 선호한다”고 말했듯, ‘파리의 연인’을 제외하면 대체로 두 주인공은 극 중에서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다만 ‘시크릿 가든’ ‘태후’의 그들처럼 죽음에 맞서는 용기를 내거나, ‘신사의 품격’(2012, SBS)의 이수(김하늘)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사춘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랑을 가로막던 조건보다 더한 역경을 겪은 뒤 두 사람은 깊어진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우연히 스치기도 힘들 만큼 전혀 다른 세계에 살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일, 그 사랑의 힘으로 계급적·직업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 이는 김은숙 드라마의 궁극적 주제다. 이를 위해 김 작가는 다양한 장치를 활용했다. ‘시크릿 가든’에선 남녀의 몸이 뒤바뀌는 환상적 설정을 내세워 운명적 사랑을 강조했고, ‘상속자들’은 주인공 연령대를 10대로 낮추어 계급 차를 뛰어넘을 희망적 미래를 암시했다. ‘태후’는 중앙아시아의 가상 국가이자 난민 국가인 우르크를 배경으로 내세웠다. 즉, 모든 현실적 조건을 내려놓고 군인과 의사가 사랑에 빠질 만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전까지의 김은숙 드라마가 로맨스를 통해 견고한 계급 사회에 균열을 일으켜 온 것과 달리, ‘태후’는 국가관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시진은 평화 유지를 위해 우르크에 파병됐고, 모연은 의료 봉사차 그곳에 왔다. 김 작가의 말처럼 “우르크는 2004년 한국이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이라크를 상징”한다.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곳에서 둘은 “조국이 지켜야 할 국민의 인권”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아이와 노인과 미인은 보호해야 한다는 믿음,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고딩’을 보면 무섭긴 하지만 한소리 할 수 있는 용기 (중략) 그래서 지켜지는 군인의 명예. 내가 생각하는 애국심은 그런 겁니다.” 시진의 이러한 말은 김 작가가 지닌 상식과 원칙,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국가적 신념을 또렷이 드러낸다. 동시에 “한국을 미국 등 강대국의 하위 파트너로서 약소국을 보호하는 국가로 그려낸 부분에 보수우파의 관점이 보인다”(황진미 영화평론가), “전쟁을 겪은 한국인의 역사적 열등감을 허구로 극복하려 한다”(이승한 TV칼럼니스트)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 김 작가는 ‘시티홀’부터 포스트 386세대의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 왔다. 국가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태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평가는 엇갈리겠지만, 분명한 건 그는 지금 ‘아시아 로맨스’의 원형을 작가 자신의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황미요조 영화평론가의 말이다.

글=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NEW·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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