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호갱 낚시’실력이 경쟁력 된 세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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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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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싱의 경제학
조지 애커로프 & 로버트 실러 지음
조성숙 옮김, RHK
424쪽, 1만9000원

눈을 감건 감지 않건 코 베어 가는 데가 서울이라고 했다. 『피싱의 경제학』에 따르면 ‘시장’이라는 체제도 우리가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곳이다.

『피싱의 경제학』의 원제는 ‘호구(虎口) 낚기: 조작과 기만의 경제학(Phishing for Phools: The Economics of Manipulation and Deception)’이다. ‘호구’는 비속어 같지만 엄연히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단어다.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돼 있다.

모든 소비자는 ‘자기 딴에는’ 똑똑한 선택을 한다. 하지만 똑똑하지 않다. 예컨대 인구의 3분의 1이 비만인 미국에서 소비자들은 체형을 악화시키는 음식을 끊지 못한다. 물건이건 서비스건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산다. 다음달 카드 값 낼 생각에 잠이 안 온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몸에 좋은 것을 사서 먹고, 저축을 더 많이 하고, 담배를 끊겠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잘못된 선택을 한다.

소비자가 ‘호갱’이 되는 이유는 뭘까. 각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애커로프(2001년)와 로버트 실러(2013년)에 따르면 기업들이 소비자를 ‘착취’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애커로프는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남편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감정과 무지를 파고든다. 특히 소비자들은 ‘정보 불균형’의 희생자다. 사람은 경제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심리적인 존재다. 지나친 낙관론과 자신감에 빠져있다. 현실편향(present bias)때문에 장기적인 계획 세우기에 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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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경제 곳곳에는 ‘피싱’의 덫이 깔려있다. 정보가 부족한 ‘정보 바보’와 심리적 자극에 쉽게 흔들리는 ‘심리 바보’가 걸려드는 덫이다. [사진 RHK]

어쩌면 그들 기업 또한 어쩔 수 없다. 이윤의 폭이 주는 데다가 경쟁이 치열해 제품과 용역을 파는 게 쉽지 않다. 낚기에 나설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낚시질 성공 사례들을 너도 나도 따라 한다. 꼬리가 길면 소비자를 속이는 기업은 망하게 돼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속여야 살아남는다. 잘 속이는 것도 기업 경쟁력의 주요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소수의 ‘악덕’ 기업들만 ‘낚시질’을 구사하는 게 아니다. 낚시질은 시장 전체에 만연돼 있다. ‘낚시질’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저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래 생긴 경제학의 신조들에 의문을 던진다. 시장은 병도 주고 약도 준다. 시장은 선택과 풍요의 수혜자 뿐만 아니라 기만과 조작의 희생자를 낳는다. 시장에는 양면성이 있다. 2008~2009년 금융위기에서도 피싱은 제 몫을 했다.

이 책은 ‘사람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계산적이며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경제학의 전제를 깬다. 저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합리성이 아니라 시장이 제시하는 ‘스토리’에 취약한 상태로 노출돼 있다. 광고회사들이 만들어내는 ‘스토리’는 일종의 ‘가상현실’을 구성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정부의 개입과 통제, 시민단체의 활동이 필요하다.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게 하는 ‘누가 되도 마찬가지다’라는 시각 자체가 정치적인 낚시질이다. 물론 정부 또한 ‘어부’인 경우가 많다. ‘호구 유권자’가 나쁜 정부를 만든다. 왜일까.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공익보다는 사익에 의해 움직이는 이들도 많다. 소비자 주권 못지 않게 위협받고 있는 게 국민의 주권이다. 첨단 기법의 발달로 기업과 정당은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싱' 등장 후 철자법도 변형

“패션의 피(P)자도 모른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 언젠가는 fashion과는 별도로 ‘phashion’이라는 말이 새로 생겨나 일상 언어 속으로 들어올 날이 올 지 모른다.

f를 ph로 바꾸는 유행을 시작한 원조는 프리크(phreak· 전화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사람)다. 원래 철자는 괴짜·괴물을 의미하는 ‘freak’다.

피싱의 영문 표기는 ‘phishing’이다. 199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 단어의 어원은 fishing(낚기)이다. 개인데이터(private data)와 fishing의 조합으로 알려졌는데 사실과 다르다. 그저 fishing의 f를 ph로 표기했을 뿐이다.

저자들이 정의하는 낚기(phishing)이란 “‘어부(phisherman)’의 타깃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어부의 이익에 맞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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