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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연재소설] 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33] 첫 번째 그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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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일뿐…탈출 방법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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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아메티스트가 그려낸 첫 그림은
첫 번째 인류에 관한 것이었다
지친 채로 임무 후 얘기를 하는 수리에게
폴리페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는데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제발 우리를 해치는 내용이 아니어야 할 텐데… 난 돼지니까. 난 밥통이니까… 죽어 마땅해….”

마루는 쏟아지는 비난의 소리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비난의 소리는 손가락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 모나는 마루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나도 내 전사들을 죽게 만들었어….”

모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비와 마루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사비, 마루, 너희는 아빠를 찾아 이곳에 왔다. 이 고통도 너희는 잘 견디어 낼 거야. 너희 종족은 비범하다.”

사비가 겨우 고개를 들어 모나를 쳐다보았다.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모나는 눈을 부릅떴다. 비난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비난의 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동물은 먹잇감을 놓고 싸우고 먹잇감이 해결되고 나면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땅을 넓히거나 집을 짓거나 하지 않는다. 동물은 궁금한 걸 찾아 어디론가 모험을 떠나지 않아!”

모나의 음성이 비난의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생존과 아무 상관없는 별을 찾아 은하를 찾아 떠나고 아빠가 보내는 비밀스런 메시지를 찾아 떠나기도 하지. 정말 아름다운 종족이다.”

모나에게 이제 비난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난 많은 전투를 겪었다. 나의 실수로 전사들이 죽기도 했어. 하지만 앞으로 나는 나의 전사들을 결코 죽게 하지 않을 거다.”

모나도 울고 사비도 울고 마루도 울었다. 나비의 노래는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비의 노래는 언뜻 허밍처럼 들렸다.

아메티스트가 그려낸 ‘첫 번째 인류’

42명의 호미니드는 아프리카의 어느 벌판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는 곳에는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이 모두 헐벗은 채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로 서 있었다. 푸른 이파리도 없었고 붉은 열매도 없었다. 원숭이 종류의 에이프들은 굶주린 채 나뭇가지에 힘없이 축축 늘어져 있거나 배고픔에 지쳐 땅에 떨어져 죽어 있기도 했다.

태양은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죽일 듯이 달아올라 있었다. 빨간색 동물 가죽을 외투처럼 걸치고, 42명의 무리를 이끌고 있던 대장이 문뜩 멈추었다. 저 멀리 지평선 쪽에 눈이 부시도록 번쩍이는 빛의 파편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운 없이 막연하게 대장을 따라 걷던 무리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의 20년 정도의 짧은 생 중 가장 열심히 달렸을 것이다. 번쩍이며 무리를 유혹하던 빛의 파편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으나 막상 쫓아보니 하염없이 멀었다. 중간에 쓰러지거나 뒤처지는 호미니드도 있었지만 서로 부축하며 빛의 파편이 넘실거리는 빛의 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모두 망연자실했다. 대장은 대장답게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머지 호미니드는 주저앉거나 울부짖었다. 물의 강이 아니었다. 물의 땅이 아니었다. 물의 파편은 한낱 신기루였다.

이제 물마저 없다면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몰랐다.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 할 수도 있었다. 밤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밤의 싸늘한 기운을 뚫고 번들거리는 악마의 눈알이 그들을 포위했다. 굶주린 짐승들의 눈알이었다. 호미니드들은 더 이상 사냥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알만 드러내던 짐승들은 점점 다가왔다. 호미니드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로 작정했다. 순간 저 먼 하늘에서 불빛이 번쩍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큰 빛이었다.

큰 빛은 눈을 갖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눈이 끔뻑거릴 때마다 눈의 빛은 비바람 부는 날의 번개처럼 그렇게 번쩍번쩍거렸다. 짐승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새까맣게 타 죽었다.

그리고 큰 눈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미니드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일어나 입을 크게 벌리고 빗물을 듬뿍 받아 마셨다. 대장은 검게 타서 죽은 짐승들을 뭉툭한 손도끼로 능숙하게 살점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라낸 살점을 자신의 무리들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먹였다. 그날 호미니드들은 고기를 배불리 먹었고 물도 실컷 마셨다.

비는 그날로부터 52일간 내렸다. 무리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계속 이동할 수 있었다.

숫자의 순서가 뒤바뀐 노래

수리는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채 숨을 가쁘게 쉬었다. 수리가 멈추자 나비의 노랫소리도 멈췄다.

아메티스트가 눈을 떴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수리를 부축했다.

“좀 쉬었다 해야겠어.”

아메티스트는 수리가 안타까웠다.

“폴리페서가 보고 있을 텐데?”

수리는 자신이 실수라도 하면 사비와 마루 그리고 골리 쌤, 썸과 볼트가 죽임을 당할까 봐 지나치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내가 있잖아?”

아메티스트는 해맑게 웃었다.

“너는 약한 소녀에 불과해.”

수리는 여전히 멋있는 척했다.

“난, 네가 간직한 숫자의 비밀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날 함부로 죽일 순 없어.”

수리는 아메티스트가 자꾸 좋아지고 있었다.

“난 너를 데려가고 싶어, 내가 살던 세상으로.”

아메티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아빠를 찾으면, 그러니까 내 임무를 완수하면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해… 널 데려가고 싶어. 내가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허풍과 당당함의 아이콘인 수리가 어쩐 일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제발 데려가 줘. 수리.”

아메티스트도 얼굴이 빨개졌다.

그때 폴리페서와 일행이 들이닥쳤다. 폴리페서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너희 둘이 연애질 하느라고 친구들이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냐?”

아메티스트가 벌떡 일어났다.

“먹을 거라도 주세요.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어요. 어차피 나비도 계속 노래할 수 없잖아요?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 죽고 말아요.”

수리는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아메티스트는 분명히 죽는다고 말했다.

“하긴… 어차피 죽을 목숨이긴 하니까… 내가 관용을 베풀지. 하지만 앞으로 3일의 시간을 주겠다.”

돌아나가는 폴리페서를 향해 아메티스트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편안하게 해주세요, 먹을 것도 주시고요.”

폴리페서는 획 돌아보았다.

“그건 안될 말. 그들은 계속 비난의 방에 있어야 할 것이다. 수리와 네가 빨리 마칠수록 아이들은 비난의 방에서 해방될 수 있다.”

“아빠는요!”

수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폴리페서는 수리를 보고 음흉하게 웃을 뿐 아무런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내가 죽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메티스트는 주저했다. 수리는 아메티스트를 뚫어지게 보았다.

“내가 너의 비밀을 모두 알아내면 너는 소멸되어 버려. 그 이상은 나도 몰라.”

“그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수리는 각오를 다졌다. 아메티스트는 또 주저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너의 친구들은 비난의 방에서 고통 속에 죽게 될 거야. 아빠도 만날 수 없게 될 거고.”

수리는 실망한 표정으로 그림의 방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두 손을 허공에 내지르며 소리쳤다.

“난 긍정의 호모 사피엔스야. 난 이겨낼 거야. 이겨낼 거라고!”

아메티스트는 그런 수리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나, 가슴이 뛰었어. 이런 거 처음이야. 난 기계야. 이런 걸 느낄 수 없는 기계라고.”

수리는 아메티스트의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

“어쩌면 넌 기계가 아닐지도 몰라. 네가 말하는 기계와 우리가 말하는 기계가 다른 의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방금.”

아메티스트도 수리의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

“탈출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방법이 있기는 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메티스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새들과 모든 물고기와 모든 바람이 서로 사랑을 했네. 그곳에서 태양이 태어나고 달이 태어나고 별이 태어났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났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태어났네. 누구보다 누구보다 키가 컸네.”

“이 노래 어떻게 알아?”

수리는 놀란 나머지 아메티스트의 두 팔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아메티스트는 아파서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종족의 노래야. 잘못 만들어져서 버려진 아이들의 노래!”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수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계속 노래하게 해줘. 이유가 있으니까.”

아메티스트는 눈을 찡긋했다. 윙크였다. 수리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메티스트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순간 투명한 우주의 창으로 거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수리도 깜짝 놀라고 아메티스트도 깜짝 놀랐다.

“이건 숫자의 순서가 뒤바뀐 거야.”

수리는 비명을 질렀다.

도시는 어마어마했다. 수리가 살던 세상에도 이런 도시는 없었다. 즐비하게 들어선 마천루는 얼마나 높았던지 하늘에 닿아 있었고 구름은 건물의 중간에 걸쳐 있었다. 하얀 낮의 새들과 함께 작은 비행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수리는 수많은 거인들을 보았다. 분명히 누이들이었다. 이스터 섬의 거인석상들처럼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태양은 지나치게 밝고 뜨거웠다. 저 먼 하늘에서 혜성이라도 나타난 듯 빛의 꼬리가 보였다. 커다란 눈이 나타났다.

팬옵티콘의 그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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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 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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