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명필이자 대학자인 추사 김정희(1786~1856), 한국 현대 단색화 화가 윤형근(1928~2007),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작가 도널드 저드(1928~94)가 한 전시장에 모였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통하는 이들 3인의 합방을 주선한 곳은 서울 삼청로 PKM 갤러리. 지난 달 29일 막을 올린 ‘포용: 윤형근과 추사 그리고 도널드 저드’는 시공(時空)을 뛰어넘은 예술혼의 만남으로 특별한 전시다. 이들은 어떤 인연으로 사후에 한자리에서 작품으로 해후하게 되었을까.
PKM 갤러리서 18일까지 전시
윤형근은 최근 국제 미술시장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다. 거칠고 투박한 생 마포(麻布) 위에 넓고 굵은 귀얄 붓으로 죽죽 그어 내린 암갈색 화면은 일획 일색으로 담백하고 담담하다.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썩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를 보고 크게 깨달아 이런 다갈색 단색화를 그리게 됐다는 작가의 기록은 생에 대한 허무와 열망의 경계선에 선 사람의 고백처럼 들린다.
윤형근은 생전에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기운생동이 잘 드러난 추사의 서예에 후대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경도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윤형근은 특히 선(線)을 다루는 추사의 공간 운용에 매혹되었던 듯하다. 붓으로 칠한 부분과 능동적으로 남긴 공백(空白) 사이에서 피어나는 팽팽한 구조미는 보는 이에게 색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윤형근의 회화가 얼핏 붓글씨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동갑내기 서양 작가인 도널드 저드는 윤형근의 단색화가 지닌 이런 절제미와 서예 방식을 첫 눈에 발견한 사람이다. 1990년 초 자신의 개인전을 위해 서울에 온 저드는 당시 윤형근의 작품을 접하고 바로 매료됐다. 그는 4년 뒤 자신이 설립한 미국 텍사스 마르파의 치나티 파운데이션(The Chinati Foundation)에 윤 화백을 초대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합판과 알루미늄 등 공업재료와 일상적 물질로 각지고 평평한 지극히 단순한 물체를 만들었던 저드의 작품세계는 윤형근과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들의 교유는 예술을 통한 형제애처럼 세월과 지역을 초월해 20여 년 뒤 다시 한국에서 만났다.
미술평론가 김현숙 성균관대 교수는 “저드의 ‘구체적 오브제’와 윤형근의 다갈색 그림은 단일한 직사각형의 배열이라는 시각적 유사성을 넘어서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순간과 영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구조화하여 표현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평했다. 전시제목 ‘포용’이야말로 동서고금을 이은 이들 3인의 정신세계를 은유하고 있다.
이 전시는 어렵게 모은 세 사람의 작품 보호를 위해 일반 상시 관람을 제한한다. 전화나 e메일 예약제로 운영되며 입장료는 1만 원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1시, 오후 3시 하루 두 번 예약한 관람객에게만 개방한다. 전시는 18일까지. 02-734-9467(info@pkmgallery.com)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