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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사진관] 염천교 수제화거리의 구두장인들

중앙일보

입력

답답하죠. 서울역 고가공원 공사 시작 이후 매출의 2/3가 줄었어요."

서울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 있는 대신제화 안병인(65) 사장의 말이다. 기자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만 보이면 바로 나가 손님맞이를 해보지만 오전 내내 한 켤레도 팔지 못했다.

충주가 고향인 안 사장은 19세 때 서울로 올라와 숙식을 제공받으며 신발 제조 기술을 배웠다. 그 후 자신의 가게를 내고 30년이 지났지만 지금처럼 장사가 안 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안 사장은 "월세가 140만 원인 가게를 유지하고 먹고 살려면 아무리 못해도 하루 10켤레는 팔아야 하는 데 요즘 공치는 날이 다반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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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인 대신제화 사장이 구두를 들고 고가공원 공사 이후 매출이 줄어든 상황을 말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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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교 인근 칠패로 수제화 거리가 손님이 없어 한산한 모습이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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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교 수제화 거리가 고가공원 공사 이후 손님이 줄어 한산하다. 신인섭 기자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서울역 북부에 위치해 있지만 접근성은 좋지 않다. 가까운 전철역인 충정로역, 서대문역에서 걷기에는 먼 거리이고 서울역에서 내려도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승용차를 타고 와 가게 앞에 잠시 주차한 뒤 구두를 사곤 했다. 그러나 고가공원화 공사 이후 가게 앞 도로인 칠패로가 하루 종일 정체를 빚으면서 주차 불가 지역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길 건너에 있던 서소문공원 지하주차장도 천주교 성지화 작업으로 폐쇄됐다. 결국, 수제화거리 상점들은 매출 감소라는 폭탄을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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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림동, 칠패로, 봉래동 수제화 거리의 위치, 서울역과 주변 전철역에서 찾아오기가 쉽지않다. 신인섭 기자

매출감소 폭탄을 맞은 상인들은 공사항의 현수막을 걸었다. 주차 문제 해결이 우선이지만 현재 뚜렷한 방안은 없다. 결국 상인들은 2017년으로 예정된 서울역 고가공원 공사가 빨리 끝나기 만을 고대하고 있다. 상인들은 공사가 끝난 뒤 주변에 있는 약현성당, 서소문공원 천주교성지, 손기정 기념관 등과 연계한 관광벨트가 형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곳을 찾는 보행관광객이 늘면 수제화거리를 찾는 손님도 늘 것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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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감소 직격탄을 맞은 상인들이 고가공원 공사항의 현수막을 걸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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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공원 공사 이후 수제화 거리 앞 칠패로는 하루종일 차량정체를 빚고 있다. 신인섭 기자

이 거리에서 36년간 장사를 한 털보제화 박공수(70) 사장도 공사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공사 완료 후 1년을 더 지내 본 뒤에도 매출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가게를 접어야 할 것 같다."라고 박 사장은 말했다. 근처 중림동에서 공장도 함께 했던 박 사장은 구두업계에서 일한 지 56년 됐다. 현재는 가게만 운영하며 공장은 후배들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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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 내에 진열된 신사화. 최하 5만 원에서 수작업이 많이 들어간 구두는 15만 원까지 한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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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 내에 진열된 여성화. 여성화는 신사화에 비해 수작업이 많아 비싼 편이다. 최고 18만 원까지 한다. 신인섭 기자

제화공장 드봉을 운영하고 있는 김평수 대표(54)도 현재 상황은 어쩔 수 없으니 버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건물 지하층에 위치한 공장에는 현재 7명이 일하고 있다. 많을 때는 직원이 20명까지 있었다. 국내 제화업계는 값싼 중국산이 몰려 오면서 더욱 힘들어 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 중에 젊은이는 없다. 최고령은 77세다. 구두 만드는 과정에 따라 분업을 한다. 직원 임금은 만든 개수 당 6000원을 준다. 그나마도 물량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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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일하는 허수아(77)씨. 오랜 작업으로 작업복 바지의 오른쪽만 검게 변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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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일하는 허수아(77)씨. 이곳에서 15년 근무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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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일하는 허수아(77)씨. 이곳에서 15년 근무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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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일하는 허수아(77)씨. 이곳에서 15년 근무했다. 신인섭 기자

이곳 수제화거리에서는 인조피혁이 아닌 천연가죽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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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는 직원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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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는 직원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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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의 작업실 전체 모습.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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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는 직원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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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과정 중 접히는 부분을 얇게 만들기 위해 가죽을 갈아내고 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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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공장 드봉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는 직원. 갑피(가죽 재봉질) 작업을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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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 작업대에 놓여 있는 가죽 재료와 부속품들. 신인섭 기자

김평수 대표는 구두는 패션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옷을 아무리 잘 입어도 마지막 단계인 신발을 엉뚱하게 신고 나오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신제화 안병인(65) 사장은 "외국여행에서 신발을 사 신는 것은 발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 길이에 비해 볼이 넓은 편이지만 서양사람들은 '칼 발'이라고 불릴 정도로 볼이 좁고 발 길이가 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발 볼에 비해 좁은 신발을 신으면 걸을 때 불편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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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업체가 단체구입한 슬리퍼. 자수를 놓고 업체 이름을 적어 놓았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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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흡수를 높이기 위해 스프링을 부착한 신발 밑창.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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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밑창에 들어가는 부품과 신발틀.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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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복잡하면 손길도 많이 가 가격이 비싸진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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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봉 김평수 대표가 새로운 디자인의 여성화를 시험제작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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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봉 김평수 대표가 새로운 디자인의 여성화를 시험제작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염천교 수제화거리는 1925년 일제시대 때 서울역 인근에 피혁창고가 생기고 구두상인들이 모이면서 시작됐다. 해방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군 중고 군화를 수선해 팔기 시작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호황기였던 1970~1980년대에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구두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수제화 거리의 점포들은 도매를 전문으로 했으나 현재는 도매와 소매를 겸하고 있다.

신사화를 만들려면 1주일 정도 걸린다. 라스트(last, 신발 틀) 깎기, 디자인에 따른 패턴만들기, 가죽 재단, 갑피(가죽 재봉질), 저부(가죽을 씌운 뒤 굽 부착하는 작업)와 같은 공정이 필요하다.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가죽 재단도 기계화가 어렵다. 같은 가죽 원피라도 질이 좋지 않은 부분은 피하면서 재단하기 때문에 일일이 눈으로 보면서 가위로 재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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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죽 전체 중에서 거친 등줄기 부분(진하게 누렇게 된 곳)을 피해 재단한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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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디자인에 따라 가죽이 여러 조각으로 나뉜다.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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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집이 많은 소가죽 같은 경우 울퉁불퉁하게 재가공해 거친 느낌의 가죽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신인섭 기자

이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도 이곳에서는 보통 신사화 한 켤레당 5만 원에서 8만 원에 거래된다. 디자인에 따라 수작업이 많이 들어가는 경우 신사화는 15만 원 숙녀화는 18만원까지 하기도 한다.

현재 중림동 칠패로와 봉래동 등에는 90여 구두업체가 영업을 하고 있다. 중구청은 '건강한 발, 건강한 구두로 다시 태어나는 염천교 수제화거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이곳을 특화거리로 육성할 계획이다. 권기호 미래제화 사장(66) 겸 상우회장은 "고가공원 공사로 침체한 염천교 수제화 거리를 알리기 위해 4월 말 수제화거리 홍보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글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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