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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와 스카를라티에 최적화된 연주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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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호 27면

컴퓨터를 쓰다 보면 최적화라는 말과 가끔 마주친다. 연주의 세계에도 한 작곡가의 작품들, 심지어 한 작품에만 최적화된 연주가가 있다. 특정 작품에는 뚜렷하고 탁월한 연주를 들려주는데 다른 작품으로 옮겨가면 평범한 연주가 되어버린다. 재능이 뛰어난 두 여성 피아니스트도 그런 경우다.


최근 영국태생 피아니스트 조안나 맥그리거(56)가 연주한 에릭 사티의 대표작 ‘짐노페디’를 듣고 깜짝 놀랐다. 불과 3분여의 음악인데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티의 음악에는 별난 전제가 따른다. ‘그의 음악은 거짓된 성격이나 얄팍한 순응주의자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는 사티 음악을 해설한 제레미 루소의 말인데, 물론 가설일 뿐이다. 여기에 한마디 거든다면 ‘자유로운 영혼 혹은 정신의 소유자에게 사티 음악은 문을 열어 준다’고 말하고 싶다. 조안나 맥그리거의 짐노페디를 듣고 떠오른 생각이다.


사티의 음악은 프랑스 연주자 파스칼 로제나 레인버트 드 레우의 연주로 들어왔는데 신비로운 분위기, 무공해 음악이라 해도 좋을만큼 신선한 청량감은 십분 느껴졌지만 제레미 루소가 제시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탓인지 감동을 느끼거나 음악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음반을 몇 장씩 갖고 있으나 그것을 듣던 기억이 까마득한 게 증거다.


그런데 선머슴 같은 조안나 맥그리거의 연주를 들었을 때 심산계곡 폭포수 앞에 마주 선 것 같은 충격과 감동에 사로잡혔다. 산사의 종소리처럼 울림은 길고 물감이 번지듯 감흥이 스며든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맥그리거에게 사티 음악이 활짝 문을 열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맥그리거의 본령은 바흐의 ‘프랑스모음곡’이다. 바흐 세속음악의 걸작인 이 곡을 그의 연주로 처음 들었을 때 바흐를 이렇게 재즈처럼 연주해도 되나? 하는 약간의 거부반응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음악의 고귀한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되레 그 정수를 살려내고 전달하는 탁월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가락은 새털처럼 가볍게 건반 위를 날며 경쾌하고 날렵하게 연주한다. 너무 가벼워서 어떤 악구는 생략한 채 지나간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빨리 스쳐간다. 음악에 취해 듣다가 뒤늦게 가벼운 주법에 놀라게 된다.


손놀림과 팔동작을 보면 터키의 기린아 파질 세이가 떠오른다. 분방한 정신이라면 그도 할 말이 많다. 맥그리거와 파질 세이는 재즈 연주를 즐긴다는 공통점도 있다. 파질 세이는 조지 거슈인의 ‘섬서머 타임’ ‘랩소디 인 블루’ 등으로 쿠르트 마주어가 이끈 뉴욕필과 함께 음반을 냈고 맥그리거 역시 런던심포니와 함께 거슈인의 같은 곡으로 음반을 내고 있다.


그러나 맥그리거가 들려주는 바흐는 파질 세이와는 다르다. ‘신은 이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는데 바흐음악은 그 방법 가운데 하나.’ ‘바흐는 내가 신의 품안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맥그리거 연주에 대한 반응들이다. 어떤 엄숙한 바흐 연주에서도 듣지 못하던 말들이다. 이와 유사한 반응은 헤아릴 수 없다. 재즈처럼 가볍게 연주하는 바흐에서 이런 반응이 쏟아진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근원을 따져보면 그의 연주가 우연히 탄생한 것은 아니다. “우리집은 믿음이 두터운 분위기였으나 부모님은 나를 되도록 자유롭게 자라게 해주었어요. 나는 6~7세 때부터 그냥 바흐 음악을 좋아했죠. 막달라 마리아 노트에 나오는, 바흐가 어린이를 위해 만든 전주곡들을 즐겨 연습하곤 했어요.”


맥그리거는 장난감처럼 바흐를 가지고 놀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오랜 습관이 유명 연주가가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청중들이 천국과 천사를 떠올리는 것은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혼을 지닌 어린이의 연주이기 때문이 아닐까. 프랑스모음곡 5번의 사라방드에서 느끼는 애잔한 감정, 가볍고 활달한 가보트의 대비는 특별하다.


러시아 태생 니나 밀키나(1919~2006)는 오직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에게 최적화된 피아니스트인 것 같다. 기록에는 모차르트를 특히 아름답게 연주하는 아름다운 여성 피아니스트라는 짧은 소개 글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모차르트 대신 스카를라티를 그 자리에 대신하면 맞을 것 같다. 연주자의 아름다운 용모를 강조한 것은 특이한 경우다. 그의 얼굴은 대개 연필 스케치로 그려진 것들 뿐인데 사진을 찾아보고 표현이 과장이 아닌 걸 알았다.


모차르트 연주도 그렇지만 스카를라티를 떠나 다른 음악으로 옮겨가면 이 아름다운 연주자는 평범한 연주가로 변해버린다. 오직 스카를라티에서 반짝반짝 빛을 뿜어낸다. 발성만 아름다운 게 아니고 스카를라티 곡이 지닌 서민적 활달성과 슬픔을 가볍게 녹여내 서정적 분위기를 그려내는 솜씨도 탁월하다. ●


글 송영 작가 sy4003@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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