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의 왕세제 책봉 죽책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되고,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으나 이는 훗날 영조에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소론 강경파(峻少)와 남인 일부가 이인좌를 중심으로 군사봉기까지 일으키자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론 온건파(緩少)가 나서서 진압한 것이 영조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노론은 ‘소론에서 역적이 나왔다’면서 이인좌의 난을 소론 전체를 공격하는 계기로 삼았다. 자칫하면 노론만의 임금이 될 처지에 놓인 영조는 소론과 노론을 모두 비난했다. ? 경종의 충신이 영조의 역적이 되고, 영조의 충신이 경종의 역적이 되는 모순된 현실이었다. 이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양자를 다 아우르는 탕평책(蕩平策)밖에 없다고 영조는 생각했다. 탕평이란 『서경(書經)』 ‘황극(皇極)조’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란 구절에서 나온 말로서 왕도는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다. 서인이 노·소론으로 갈려 싸우던 숙종 20년경 소론의 박세채(朴世采)가 처음 주장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 영조가 사실상 노론의 추대로 즉위한 사실을 아는 소론 온건파로서는 자신들도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김흥경(金興慶)·김재로(金在魯)·유척기(兪拓基) 등 노론 대신들은 이에 반발해 사퇴했다. 그런 과정에서 각 노·소론의 현실적인 정치가들이 탕평파를 구성하는데 노론에서는 홍치중(洪致中) 등이, 소론에서는 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 형제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였다. 홍치중은 이 때문에 노론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탕평파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이던 척박한 정치현실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모색했던 정치세력이었다. ? 그러나 탕평파의 입지를 좁힌 것은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신원 문제였다. 이는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소론과 노론의 탕평파가 타협을 위해 만든 명분이 ‘죄의 경중이 같지 않다’는 분등설(分等說)이었다. 분등설은 경종 때 연잉군을 세자로 건저(建儲)하고 대리청정을 주창한 행위와 임인옥사를 구분해 처리하자는 절충안이었다. 연잉군(영조)을 추대한 경종 때의 세자 대리청정 요구는 충(忠)이지만 임인옥사는 역(逆)이라는 방안이었다. 각 당의 탕평파들 사이에는 타협의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노론 4대신 중 손자 김성행과 아들 이기지가 임인옥사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① 조문명 초상 조문명은 소론 탕평파로서 그의 딸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부인이 되었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 ② 영조의 탕평비 성균관대 안에 세워졌다. ‘두루 화친하되 편당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심이고, 편당하며 두루 화친하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사의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예기』의 구절을 새겨놓았다. 사진가 권태균
영조는 탕평책을 확산시키기 위해 소론 탕평파 조문명의 건의를 받아들여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인사부서에서 3명의 후보자를 주의(注擬)해서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요청할 때 각 당파를 골고루 포함시켜야 하고, 한 부서 안에도 각 당파가 고루 포진해야 한다는 인사원칙이었다. 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을 등용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탕평책은 유지되었으나 노론은 두 대신이 신원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 과거사에 매달리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재위 14년(1738) 12월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했다. 중전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신원한 것인데, 이는 임인옥사에 대한 영조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드디어 재위 16년(1740:경신) 1월에는 김창집과 이이명도 신원시켜 노론 4대신 모두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나아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를 무고로 처분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했다. 그러자 연잉군(영조)의 미래를 부탁했다는 숙종의 유조(遺詔)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삼급수 중 숙종의 유서를 이용해 경종을 내쫓으려는 평지수가 실제 숙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 역모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 그러나 영조는 김용택의 아들 김원재를 국문한 후 숙종의 유시(遺詩)는 김용택이 위조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조는 과거사 정리를 계속해 재위 17년(1741)에는 드디어 ‘신유대훈(辛酉大訓)’을 선포한다. 영조는 재위 17년(1741)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경종 당시 있었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었다고 선포했다. 영조는 이로써 자신의 과거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사는 경종의 편에 섰다가 자신이 즉위하면서 몰락한 소론 강경파(埈少)와 화해를 통해서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 신유대훈에 동의한 소론은 정권에 참여했던 온건파(緩少)뿐이었다. 게다가 신유대훈 이후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탕평책은 명목상의 존재로 격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영조 31년(1755)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의 급보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이었다. 나주 객사(客舍)인 망화루(望華樓) 정문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걸리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영조는 좌·우변(左右邊) 포도대장을 입시시켜 기한을 정해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 영조는 같은 해 4월 태묘(太廟: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모두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는 이를 축하하는 토역(討逆) 경과(慶科)를 베풀었다.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행하는 특별 과거였다. 그런데 파리 머리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를 비난하는 시권(試券: 과거 답안지)이 제출되어 영조를 경악케 했다. 이인좌의 봉기 때 사형당한 심성연(沈成衍)의 동생 심정연(沈鼎衍)이 제출한 시권이었다. 또 답안 대신 ‘상변서(上變書)’도 제출되었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나의 마음으로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 영조는 경종의 충신으로 자처하는 소론 강경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영조는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갑주를 입고 친국에 임했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영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이때 임금이 크게 노하고 또 매우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 머리)을 깃대 끝에다 매달고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하면서, ‘김일경과 목호룡의 마음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려라’라고 말했다.…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다.(『영조실록』 31년 5월 6일)”
? 분노 속에 술을 마셔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사형을 남발했다. 영조는 “내가 반드시 그 소굴을 찾아낸 후에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다”라고 다짐했다. 영조와 노론 정권은 연루자를 모두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 영조는 형식적 탕평책마저 완전히 붕괴시켰다. 영조는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발간했는데, 노론 4대신은 물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한 김용택 등도 모두 충신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게장은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 대궐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는 대비 인원왕후의 변명도 실었다. 영조와 노론, 그리고 인원왕후의 ‘과거사 다시 쓰기’였다. ? 그러나 경종 시절 영조와 노론의 행위는 경종의 자리는 물론 어느 국왕의 자리에서 볼 때도 반역행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영조와 노론의 과거사 지우기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재위 32년(1756)에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고 노론 일당 독주가 강화되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44호 2009년 12월 13일, 제147호 2010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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