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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⑩ 예수는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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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물음표다. 예수는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을까. 그건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비유일까.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첫 이적’을 보인 마을은 ‘가나’다. 갈릴리에서 가나까진 멀지 않다. 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다. 자동차를 렌트했다. 갈릴리 호숫가인 티베리아스에서 77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가 내비게이션 기능까지 제공해 운전은 어렵지 않았다. 77번 도로는 널찍했다. 차들은 쌩쌩 달렸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산 위로 올라갔을 때 펼쳐지는 고원 풍경이 장관이었다. ‘갈릴리’하면 호수만 떠올랐는데, 그게 아니었다. 갈릴리 일대는 고원 지대가 펼쳐지는 거대한 산촌(山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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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로 진입하는 입구. 아치에 영어로 ‘WELCOME TO KANA’라고 적혀 있다.

20분가량 달리자 가나가 보였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높다란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탑이었다. 도시 진입로에는 ‘가나’임을 알리는 허름한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WELCOME TO KANA’라는 영어 표기 다음에 이슬람 문자가 있고, 그 다음에는 유대인들이 쓰는 히브리 문자가 있었다. 그처럼 가나에는 그리스도교인과 이슬람교인, 그리고 유대교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가나의 혼인잔치 교회로 갔다. 자동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몇 번이나 헤맨 끝에 골목을 돌아 교회를 찾았다. 예수는 이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이적’을 보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곳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왔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마리아도 알고, 예수도 아는 인물. 예수의 친척쯤이나 됐을까. 성서에는 결혼식 주인공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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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로 가는 골목에 조그만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가나 혼인잔치 일화와 관련한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복음서에는 ‘사흘째 되는 날’ 혼인 잔치가 있었다고 한다. 요일은 따로 기록돼 있지 않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무슨 요일인지 알고 있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한 주가 끝나는 날이다. 그리고 일, 월, 화로 새로운 주가 시작된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은 화요일이다. 가나 혼인잔치는 화요일에 열렸다. 지금도 가나의 유대인들은 ‘화요일 결혼식’을 선호한다.

교회 앞에서 만난 유대인은 “결혼식 자체가 행운의 날이다. 게다가 예수님의 이적까지 나타났기에 가나 사람들은 화요일에 치르는 결혼식을 ‘더블 럭(Double Luckㆍ두 배의 행운)’이라 부른다. 요즘 젊은이들도 결혼식 날짜를 화요일로 잡는 걸 더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길일(吉日)’이다. 마치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잡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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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 교회로 가는 골목의 담벼락에 요한복음 구절이 새겨져 있다.

골목을 따라갔다. 담벼락에는 요한복음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On the third day, there was a marriage at Cana in Galilee…(사흘째 되는 날,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요한복음 2장1절) 잠시 후 교회가 나타났다. 예수는 여기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당시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유대 사회에서 하객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건 혼주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정결례(식사 전 손을 씻는 일)에 쓰는 물독 여섯 개가 앞에 있었다. 예수는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고 말했다. 일꾼들은 물독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는 “그것을 퍼서 연회장(혼인잔치 등 축제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주어라”고 했다. 연회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봤다. 그리고 신랑을 불러 말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복음 2장6~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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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조토 디 본도네의 작품 ‘가나의 혼인’.

‘예수의 포도주 이적’은 논쟁의 대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멀쩡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게 가능한가? 아무리 하느님의 아들이라 해도 그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 아닌가?” “성서의 이적 일화는 예수 후대에 추가된 이야기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위해 가공한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거세게 반박한다. “그러니까 신의 아들이지. 자연의 흐름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힘을 보여주니까 신의 아들이지. 그래서 물이 포도주가 된 거다. 그게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란 징표다. 거기에 물음표를 다는 것 자체가 당신 안에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다.” 논쟁은 끝이 없다. 양쪽은 끝도 없이 평행선을 달린다.

가나 혼인잔치 교회의 뜰에 섰다. 궁금했다. 성서 속의 일화는 늘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그럼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 일화에 담긴 메시지는 뭘까. 그걸 통해 예수는 무엇을 우리에게 건네고자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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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혼인잔치 교회 전경. 지금은 가톨릭 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늘나라 사람’에 대한 그림이 있었다. ‘천국의 사람들은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는 나름의 추측이었다. 그런 추측을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과 전통 속에서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계속해서 “이적을 보여달라”“기적을 행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에도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깔려 있다. 그들은 이적을 통해 ‘천국 사람’을 확인하고자 했다. 왜 그럴까. 구약에는 ‘신의 이름’을 통해 이루어지는 숱한 이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 당시에도 유대인은 구약을 믿는 민족이었다.

사실 예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물을 다른 것으로 바꾼 사람 말이다. 구약의 모세가 먼저였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 올라갔다. 거기서 불 붙은 떨기나무와 함께 신의 음성을 들었다. “이제 나는 내 백성을 구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너는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라.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스스로 있는 분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해라.” 당시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다. 모세는 걱정이 됐다. ‘가서 이 말을 전한다한들 그들이 믿을까.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걸 사람들이 순순히 믿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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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불타는 떨기나무’. 호렙산에서 모세가 신의 음성을 듣고 있다.

모세의 걱정을 읽은 하느님이 세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그 중 하나가 나일강물이었다. “사람들이 네 말을 믿지 않으면 나일강에 가서 강물을 떠라. 그리고 땅에 부어라. 그럼 그 물이 피로 바뀔 것이다.” 이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다.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 모세가 나일강물을 퍼서 땅에 붓자 피로 변했다. 그걸 보고서야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믿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도 그랬다. 모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이집트의 모든 강과 운하, 나무그릇이나 돌항아리에 있는 물까지도 피로 변해버렸다. 구약에는 그렇게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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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의 ‘모세와 아론’. 파라오를 찾아간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나일강에 담그자 강물이 피로 변했다.

모세는 강물을 피로 바꾸었고,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이적을 ‘하느님의 징표’로 여겼다. 그들은 이적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럼 예수 당시에는 어땠을까. 갈릴리의 호수에서, 산 위에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듣던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 당대의 유대인들도 ‘하느님의 징표’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들에게 구약은 ‘절대 척도’였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징표를 요구한다고 했을까.

혼인잔치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 안이 넓진 않았다. 정면 벽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 장면이다. 바닥에는 물항아리 6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일꾼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붓고 있다. 예수는 고개를 숙인 채 항아리 위로 손을 든다. 마치 “물아! 포도주로 바뀌어라”하고 명령하듯이 말이다. 그런 예수를 곁에서 마리아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다. 항아리 옆에 놓인 컵에는 붉은 포도주가 반쯤 담겨 있다. 항아리의 물이 무엇으로 변할지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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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혼인잔치 교회는 내부가 아담했다. 바닥과 정면벽의 붉은 색이 예수가 이적을 일으킨 포도주를 연상케 했다.

교회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따라 내려갔더니 오래된 유물들이 있었다. 예수 당대에 썼던 돌항아리도 전시돼 있었다. 두터운 돌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항아리로 쓰는 식이었다. 그외에도 1세기경 유물들이 여럿 보관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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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예수의 이적 일화를 담은 그림이 걸려 있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예수는 왜 이 땅에 왔을까. 이유는 하나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궁금했다. 예수가 물항아리 6개가 아니라 600개, 6000개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바꾼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는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걸 확신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도 바꾸었는데, 우리의 인생인들 더 좋게 바꾸어주지 않을까”하는 기복적 심리가 깔려 있는 걸까. 왜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이적에 매달리고 싶은 걸까.

교회 안에는 사도 요한의 동상이 있었다. ‘가나 혼인 잔치’ 일화가 신약성서 중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등장하기 때문이지 싶다.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대체 뭘까. 예수의 첫 이적,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과연 뭘까. 나와 예수 사이의 간격. 그걸 잇는 징검다리는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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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의 동상. ‘가나 혼인 잔치’ 일화는 4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등장한다.

이적의 첫 단추는 ‘물’이다. 나일강의 강물도 물이고, 가나 혼인 잔치의 물항아리를 채운 것도 물이었다. 아무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는 그냥 물이었다. 그 물이 피로 변하고, 포도주로 변했다. 무색ㆍ무미ㆍ무취의 물이 어떻게 붉디붉은 액체로 변했을까. 요한의 동상 아래에는 ‘에반겔리스트(EVANGELIST)’라고 새겨져 있었다. ‘복음서 저자’라는 뜻이다. 나는 요한복음의 첫 장을 펼쳤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3절)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 1장14절)

그랬다. 붉은 피도, 붉은 포도주도 ‘물’을 통해 생겨났다. 물이 피로 변하고,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그럼 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요한복음도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피와 포도주도 마찬가지다.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그분’을 통해 무색(無色)이 유색(有色)으로 바뀌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뀐다. 맛이 없는 게 맛을 가진 것으로, 냄새가 없는 게 냄새가 있는 것으로 변한다.

예수 역시 그렇게 이 땅에 왔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없이 계신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몸을 입고 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일이다. 불교에서는 그걸 네 글자로 표현한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空)은 만물의 바탕이다.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시ㆍ공간을 초월한 우주의 근원을 뜻한다. 그게 눈에 보이는 ‘옷’을 입으면 ‘색(色)’이 된다. 그래서 공(空)이 색(色)이 된다. 그게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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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탕 드 보(1532~1603)의 작품 ‘가나의 혼인’.

그럼 묻게 된다. 우리의 나일강물은 무엇일까. 붉은 피는 또 무엇일까. 우리도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을까. 그건 예수에게만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요한은 왜 굳이 이 일화를 성서에 집어넣은 걸까. 예수의 이적, 단지 그걸 보여주기 위함일까. 교회 뜰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혼인 잔치 때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돌항아리에 부었다고 한다. 우물 앞으로 갔다. 거기서 눈을 감았다. 내 안의 우물, 우리 안의 우물은 어디일까. 두레박을 떨어뜨리면 ‘첨벙!’하고 떨어지는, 그곳은 어디일까.

신은 인간을 지을 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나일강’이 흐른다. 무색ㆍ무미ㆍ무취의 물이 흐른다. 그게 ‘신의 속성’이다. 그게 내 안의 우물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곳에 두레박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물을 길어올린다. 우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물은 바뀐다. 때로는 피가 되고, 때로는 포도주가 되고, 때로는 숭늉이 되고, 때로는 커피가 된다. 그게 뭘까. 우리가 날마다 쓰는 ‘마음’이다. 때로는 기쁜 마음, 때로는 슬픈 마음, 때로는 화나는 마음, 때로는 아픈 마음이 된다. 그 모든 마음이 ‘내 안의 우물’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나일강물이 없다면 붉은 피도 없다. 우물물이 없다면 포도주도 없다. 물이 있기에 커피도 나오고, 숭늉도 나오고, 주스도 나온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우물(신의 속성)’이 있기에 우리가 마음을 길어올린다. 희로애락의 온갖 마음이 거기서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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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대에 사용한 돌항아리. 유대인들은 큼직한 돌의 가운데를 파서 항아리처럼 사용했다.

그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만 신비일까. 내 안에서 길어올린 두레박의 물이 온갖 마음으로 화(化)하는 것도 신비다. 예수의 ‘첫 이적’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마음을 어떻게 쓸 지를 보여준다. 가나에서는 혼인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객들은 아쉬워했을 터이고, 혼주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예수는 물로 올리브유를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커피를 만들지도 않았다.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2000년 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걸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예수의 마음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

‘네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너는 온갖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 마치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말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마음을 창조해서 써라.’ 이게 ‘마음 사용 설명서’의 골자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천지를 창조한 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25절)고 기록돼 있다. 우리는 어떨까. 마음을 창조해서 쓴 뒤에 “보기에 좋았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마음을 써먹고 있을까. 행여 우리는 포도주가 필요한 곳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올리브유가 필요한 이에게 주스를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엉뚱하게 ‘마음의 우물’에서 두레박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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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물항아리. 정결례 때 씻은 손은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손잡이가 여러 개 달려 있다.

교회에서 나왔다. 맞은편에는 조그만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교회에서 나온 외국인 순례객들도 그곳에 들렀다.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흙으로 빚은 물항아리였다. 그런데 항아리에는 손잡이가 여러 개 있었다.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먼저 오른손으로 항아리의 손잡이를 잡고 물을 부어 왼손을 씻는다. 그럼 왼손만 깨끗한 상태다. 그 다음에 오른손을 씻으려면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씻지 않은 오른손에 의해 이미 더럽혀진 손잡이를 잡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손잡이가 여러 개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정결례를 지켰다. 물항아리에 달린 손잡이 개수만 봐도 유대인들이 율법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실감이 났다.

요한복음에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이적’을 본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제자들도 예수 안에 무엇이 흐르는지 ‘예수의 주인공’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들은 이적을 보고서야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전에는 긴가민가하지 않았을까. 그럼 그들은 ‘이적을 행하는 예수’를 믿은 걸까, 아니면 ‘신의 속성을 품은 예수’를 믿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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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갸롯 유다는 왜 소금통을 쏟았을까?
 예수, “천국은 네 안에 있다.”
 예수는 좌파일까, 우파일까



이 물음은 당시 사도들만 겨누는 게 아니다. 2000년을 뛰어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화살로 날아와 꽂힌다. 내가 믿고 싶은 예수는 ‘이적을 행하는 예수’인가, 아니면 ‘신의 속성을 품은 예수’인가. 우리는 어느 통로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걸까. 이적을 통해서일까, 아니면 신의 속성을 통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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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혼인잔치 교회의 지붕에 십자가가 보인다. 그 아래 마리아와 천사의 동상이 있다.

<11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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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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