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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유학파 교수 런비스 문맹 천충잉과 결혼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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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8면

1 런비스와 천충잉의 결혼기념 사진. 1926년 3월, 상하이.

천충잉(陳琮英·진종영)은 내세울 게 없었다. 체구는 왜소하고 얼굴은 창백했다. 전족(纏足) 경험이 있다 보니 발 놀림도 둔했다. 게다가 문맹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는 사람이라곤 런비스(任弼時·임필시)가 다였다.


천충잉은 눈만 뜨면 런비스 집으로 갔다. 며칠간 머물러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남들이 런비스 집안의 동양식(童養?·민며느리)이라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런비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신이 났다. 산과 들을 뛰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청매죽마(靑梅竹馬)가 따로 없었다.


런비스는 열네 살 때 중학 문턱을 밟았다. 교사들은 런비스의 총기에 혀를 내둘렀다. 더 좋은 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교사였던 런비스의 아버지는 욕심을 냈다. 12개 현(縣)이 연합해 만든 중학에 아들을 전학시켰다. 무슨 놈에 학교가, 월사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잡비가 너무 많았다.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가계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교사들 중에는 악질들이 많았다.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제때 돈 못 내는 학생들을 들들 볶았다.


천충잉은 작은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 매달 받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돈으로 런비스의 학비를 지원했다. 중학을 마친 런비스가 모스크바로 떠날 때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걱정 말고 떠나라. 네 집안은 내가 돌보겠다.”


유학 시절 런비스는 틈만 나면 천충잉에게 편지를 보냈다. 천충잉은 편지가 올 때마다 글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음 편지가 올 때까지 이 사람 저 사람 잡고 늘어졌다. 누구냐고 물으면 결혼할 사람이라고 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런비스는 1924년 8월, 국·공합작 직후에 귀국했다. 상하이대학 러시아과 교수로 부임해 공산주의 청년단(共靑)을 조직했다. 당시 상하이대학은 합작의 결정체였다. 꿈 많은 젊은 남녀들이 상하이대학으로 몰려들었다. 합작은 말뿐이었다. 교수·학생 할 것 없이 무슨 일이건 두 패로 나뉘어 충돌했다. 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은 대범했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싸우게 내버려 둬라. 싸우다 지치면 언젠가 끝날 날이 온다”며 방치했다.


소련 유학을 마친 런비스는 혁명을 신성시하던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대학도 서서히 공산당의 천하로 변해갔다. 청년단 책임자 런비스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구애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받았다. 런비스는 피하지 않았다. 직접 만나서 이해를 구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결혼할 여자가 있었다.” 뭐 하는 여자냐고 물어도 우물거리지 않았다. “방직공장 재봉사다. 문맹이고 나보다 두 살 위다.” 소문이 퍼지자 런비스는 학내에 웃음거리가 됐다. 그래도 끄떡도 안 했다. 가까운 친구가 충고하자 정색했다. “나는 다른 여자를 염두에 둔 적이 없다. 그 덕에 중학을 마치고 유학까지 다녀왔다. 내가 딴 생각을 품는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냐? 너는 나 같은 놈을 친구로 삼겠느냐?” 더 엉뚱한 소리하는 사람에게는 주먹을 날려 버렸다.

2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 하던 시대에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왼쪽 두사람). 런비스와 천충잉은 모범부부였다.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 몰래 가끔 한눈을 팔았지만, 런비스는 그러지 않았다. 1938년 8월, 모스크바. [사진 김명호]

26년 봄, 창사(長沙)의 방직 공장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천충잉을 만나 런비스의 안부와 편지를 전했다. “나는 상하이의 당 조직 책임자다. 런비스 동지가 네가 오기를 고대한다. 상하이까지 우리가 안내하겠다.” 필적을 확인한 천충잉은 짐을 꾸렸다.


런비스를 만난 천충잉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배운 게 없다. 너의 배우자로 적합하지 않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역시 런비스였다. 웃으며 대꾸도 안했다. 며칠 후 간단한 결혼식이 열렸다. 위유런이 보낸 행서(行書) 대련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들고 왔다. 천충잉은 자신을 데리러 왔던 사람의 이름을 이날 처음 알았다. 남편이 시키는 대로 공청에 가입했다. 뭐 하는 곳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천충잉 24세, 런비스 22세 때였다.


상하이는 너무 번화했다. 까막눈이다 보니 간판을 봐도 빵집인지 극장인지 알 길이 없었다. 고향 사투리가 심해 말도 통하지 않았다. 양복에 가죽구두 신은 남편과 거리에 나오면 주눅이 들었다. 자신의 모습이 어찌나 초라한지, 남들이 웃을까 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 때 마다 런비스는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라. 숙일 이유가 없다.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그때는 고개를 숙여라.”


27년 4월 12일,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홍색 장군 장제스는 백색으로 변신했다. 공산당원을 닥치는 대로 도살했다. 국·공합작이 파열되자 공산당은 지하로 잠입했다.


코민테른과 중공은 긴급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8월 2일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두꺼비처럼 생긴 작은 청년이 방을 구하느라 분주하게 오갔다. 런비스와 동갑내기인 덩시셴(鄧希賢·등희현), 훗날 중국을 쥐었다 폈다 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었다. 며칠 만에 장소와 회의 준비를 완벽하게 해치웠다.


런비스는 평소 그림을 잘 그렸다. 화구를 챙겨 들고 우한으로 향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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