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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⑨ 갸롯 유다는 왜 소금통을 쏟았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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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은 간고등어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냉장 시설이 없었다. 고등어가 잡히는 영덕 바닷가에서 안동까지는 무려 80㎞다. 생고등어는 내륙까지 가다가 썩기 일쑤였다. 보부상들이 나귀나 달구지에 봇짐을 싣고 하루 종일 걸으면 해질녘에 임동 장터에 닿는다. 안동에서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곳이다. 상인들은 임동 장터에서 고등어에 소금을 뿌렸다. 임동 장터에는 간고등어를 사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소금에 절어서 숙성된 고등어는 더 깊은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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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노아의제사’.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올리는 제물에 소금을 뿌렸다.

유대인들은 40~50℃를 넘나드는 사막 기후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 소금은 목숨 같은 존재였다. 맛을 내는 건 기본이다. 소금은 음식의 저장과 보존에 필수였다. 소금에 절여야 음식이 썩지 않고, 오래 저장할 수도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대목까지 나온다. ‘너희가 곡식 제물로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레위기 2장13절) 그만큼 소금은 각별한 존재였다. 신에게 바치는 곡식에도 소금을 뿌려야 했고, 제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했다.

숙소에서 일찍 나왔다. 갈릴리 호수의 해돋이를 보러 갔다. 오전 5시40분쯤 호숫가로 나갔다. 이렇게 어스름이 질 무렵, 예수도 호숫가를 거닐지 않았을까. 만물이 잠들었을 때 예수는 홀로 일어나 종종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약간 어둑했다. 아직 해가 오르진 않았다. 대신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호숫가 산책로에는 조깅을 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예수는 갈릴리호 주변 어딘가에서 ‘소금’을 예로 들며 설교를 했다. 그 유명한 ‘빛과 소금’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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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숫가에 세워진 조각상. 가운데 뚫린 구멍이 갈릴리 호수의 모양이다. 북쪽 헤르몬산에서 흘러온 강이 사해를 거쳐 남쪽 요르단강으로 내려간다. 호수 건너 산 위로 여명이 비친다.

예수는 말했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가복음 9장49~50절)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복음 5장13절)

예수는 ‘짠맛’을 역설한다. 그걸 잃지 말라고,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단출하게 푼다. ‘소금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돼라.’ 이렇게 받아들인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일까. 예수가 말한 ‘소금’이란 뭘까. ‘짠맛을 잃은 소금’은 또 뭘까. 우리가 무엇을 잃을 때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걸까. 예수는 왜 주머니가 아니라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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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작품 ‘예수의 초상’. 이전 시대 예수의 초상에 등장하던 아우라를 렘브란트는 뺐다. 대신 암스테르담에 살던 유대인을 얼굴을 관찰하며 인간적인 면모의 예수 얼굴을 완성했다.

예수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김장하는 광경’이 떠오른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는 과정이다. 배춧잎은 처음에 빳빳하다. 고집이 있고, 에고가 있다. 그런데 소금과 접하는 순간 풀이 죽는다. 왜 그럴까. 에고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고 했다. 왜 ‘불 소금’일까. 그리스어 성경에는 ‘en puri(in fire)’로 표현돼 있다. ‘불 속에서 소금에 절여지다’는 뜻이다. 그럼 왜 ‘불’일까. 내가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소금과 만나는 순간, 에고는 녹기 시작한다. 그걸 통해 자신이 열린다. 그 틈으로 소금이 스며든다. 배추 안에 소금이 거하고, 소금 안에 배추가 거한다. 그게 ‘절여짐(Being salted)’이다.

절여진 배추는 달라진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지난다고 변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짠맛’ 때문이다. ‘짠맛’을 품으면 성질이 바뀐다.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이 없다. 그게 바로 짠맛의 속성이다. 부동성과 영원성.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다. 신의 속성은 흔들림이 없고 영원하다. 예수는 그걸 잃지마라고 했다.

2000년 전에도 예수는 우려했다. 행여 우리가 ‘짠맛’을 잃을까봐 걱정했다. “아무리 네가 ‘세상의 소금’을 자처해도, 네 안에 ‘짠맛’이 없다면 어쩔 거냐. ‘신의 속성’이 없다면 어쩔 거냐. 어디에 가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 마음에 ‘하느님의 속성’을 품어라.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예수의 메시지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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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 유네스코는 1980년 이 작품이 소장된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도 ‘소금 코드’가 등장한다. 유월절을 맞은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다빈치는 그 광경을 작품으로 남겼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수도원에 소장된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고 하자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는 장면이다. 빌립(오른쪽에서 네 번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가리키며 “주님, 설마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되묻는다. 다혈질이었다는 베드로(왼쪽에서 다섯 번째 머리)는 빵을 자르던 나이프를 든 채 예수를 향해 몸을 기댄다.

예수를 배반하는 갸롯 유다(왼쪽에서 네 번째 머리)는 진한 갈색 수염을 하고 있다. 그는 유대 제사장에게 은화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겼다. 그림 속 유다는 오른손에 은화 주머니를 쥐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소매 앞에는 조그만 통이 하나 넘어져 있다. 그게 소금통이다. 유다는 팔로 소금통을 쳐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소금이 쏟아져 나와 있다. 식탁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소금들.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유다가 ‘신의 속성’을 쏟아버렸음을 뜻한다. 이미 자신의 마음에서 ‘짠맛’을 잃어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숫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해뜨기 직전의 갈릴리는 고요했다. 궁금했다. 내 안의 소금통, 우리 안의 소금통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소금이 담겨 있을까. 아니면 텅텅 비어 있을까. 소금이 있다면 거기서 ‘짠맛’이 날까. 행여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우리는 수시로 소금을 쏟아버린 건 아닐까. 그렇게 우리도 예수를 배반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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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의 작품을 본 뜬 라파엘리의 모자이크화 ‘최후의 만찬’. 유다가 소금통을 쏟은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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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소금에 이어 ‘빛’도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복음 5장14~15절)

갈릴리 호수를 빙 둘러서 산과 고원이 있다. 그 위에 마을들이 있다. 날이 저물면 마을에 불이 켜진다. 갈릴리의 밤풍경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산 위의 마을, 그 불빛들이다. 그 광경을 보면 ‘산 위에 자리잡은 고을은 감추어 질 수 없다’는 구절이 절로 실감난다. 예수는 그런 빛이 모두를 비춘다고 했다.

붓다는 30대 초반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50년가량 인도 북부를 돌아다니며 설법을 했다. 그런 붓다에게 시자(비서실장)가 있었다. 붓다의 사촌인 아난이다. 그는 40년 넘게 시중을 들면서 바로 곁에서 ‘붓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봤다. 붓다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아난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영리하고 총명했다. 붓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난의 기억력에 의지해 붓다의 어록을 복원했을 정도다. 그런 아난도 붓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도 제자들이 진정한 ‘예수의 주인공’을 알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붓다는 “여기저기 부서진 수레를 가죽끈으로 동여매 억지로 지탱하듯, 내 몸도 그와 같다”며 자신의 열반을 예견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난은 눈앞이 캄캄했다. ‘붓다께서 살아계실 때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는 누구를 의지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아난은 절망했다. 그는 슬퍼하며 울었다. 그런 아난을 불러서 붓다는 말했다.“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신의 등불을 밝히고, 법의 등불을 밝혀라.(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이게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열반송이다. 붓다는 그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인도 쿠시나가르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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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쿠시나가르에 있는 붓다의 열반상. 붓다는 “내가 떠난 뒤에도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가 있다면 여래의 참된 제자요, 참다운 수행자다”고 말했다.

붓다는 ‘마음의 등불’을 켜는 법을 일러주었다. 먼저 ‘이치의 등불’을 켜야 한다. 불교에서는 그걸 ‘법(法)’이라 부른다. 그렇게 법의 등불을 켠 다음에 내 마음을 갖다대야 한다. 법의 등불과 내 마음의 등불은 둘이 아니다. 그러니 법이 ‘깜빡깜빡’할 때 내 마음도 ‘깜빡깜빡’하게, 법의 등불이 ‘활활’ 탈 때 내 마음도 ‘활활’ 타게, 법의 등불이 고요할 때 내 마음도 고요하게 맞추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불이 켜진다. 법의 등불과 똑같은 불이 내 마음에도 켜진다. 그게 바로 자등명(自燈明)이다. 붓다가 설한 ‘내 마음의 빛’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한 까닭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등불을 보면서 내 마음의 등불도 밝히라는 뜻이다. ‘가난한 마음’‘깨끗한 마음’‘자비로운 마음’ 은 모두 예수의 등불이다. 그러니 예수의 메시지를 눈 앞에 펼쳐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법등명(法燈明)’이다. 그 다음에는 어찌해야 할까. 거기에 내 마음을 갖다대야 한다. 예수는 그걸 “각자의 십자가를 져라”고 표현했다. 가령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는 예수의 등불이 켜지면 내 마음도 가난의 십자가에 올려야 한다. 그럴 때 내 안의 등잔에 불이 붙는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자등명(自燈明)이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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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해돋이는 아름답다. 산 위로 솟은 해가 순식간에 호수를 물들인다.

갈릴리 호수에 해가 떴다. 티베리아스 건너편의 산등성이 위로 해가 솟았다. 순식간이었다. 어슴푸레하게 깔려 있던 호수 위 어둠이 물러갔다.해가 뜨면 눈이 녹듯이 어둠도 녹아버렸다. 호수는 금방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주위가 환해졌다. 그랬다. 그게 빛의 힘이었다.

예수는 ‘빛과 어둠’을 가르는 눈에 대해서도 설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누가복음 11장34절)

사람들은 다들 몸을 중시한다. 그래서 몸에만 신경을 쓴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 예수가 겨누는 타깃은 다르다. 몸이 아니라 눈이다. 예수는 눈을 맑게 하면 몸도 맑아진다고 했다. 또 눈이 어두우면 몸도 어둡다고 했다. 그래서 살펴보라고 했다. 네 안을 비추는 것이 ‘밝음’인지, 아니면 ‘어둠’인지 말이다.

예수가 말한 ‘눈’은 뭘까. 안목이다. 무엇에 대한 안목일까. 이치에 대한 안목이다. 마음의 이치,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 그게 ‘신의 섭리’다. 신약성서를 관통하며 예수가 설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치(속성)다. “하느님의 마음이 깨끗하니 네 마음도 깨끗하게 해라. 그래야 하느님 마음과 네 마음이 통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식으로 이치를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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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의 1899년 작 ‘호숫가 예수의 설교’. 예수가 바위에 걸터앉아 ‘하느님 나라’의 이치를 설하고 있다.

『장자』에도 ‘이치’에 대한 일화가 있다. 문혜군 앞에서 포정이 소를 잡았다. 포정이 칼질을 하자 살점이 쓱쓱 떨어져 나왔다. 살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상림의 춤곡(桑林之舞ㆍ탕임금 당시 비를 바랄 때 쓴 무곡)’과 ‘경수의 음악(經首之會ㆍ요임금 때의 악곡)’ 같았다. 문혜군이 물었다.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포정은 ‘소 잡는 기술’이 아니라 ‘소 잡는 이치’를 터득한 것이다.

이치를 터득하는 과정을 포정이 설명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다. 3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다. 지금은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 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간다. 뼈와 살이 엉겨붙은 곳을 무리하게 가르려고 한 적도 없다. 하물며 큰 뼈를 자르는 일이 있었을까.” 포정의 설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솜씨 좋은 백정도 해마다 칼을 바꾼다. 살을 베기 때문이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꾼다. 뼈를 치기 때문이다. 지금 제 칼은 19년이나 됐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다. 그래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하다.”

포정은 무엇으로 소를 잡았을까. 몸이 아니다. ‘눈’이다. 소를 꿰뚫고 칼을 꿰뚫는 눈이다. 그게 포정의 안목이다. 그 안목으로 소를 잡으면 다르다. ‘소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서 칼을 쓰게 된다. 힘은 적게 들고 효과는 더 크다. 왜 그럴까. 이치와 함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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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그림 속 사람과 동물의 눈이 참 맑다. 그 눈을 통해 어릴 적 고향의 정겨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예수가 말한 ‘눈’도 그렇다. 예수는 왜 ‘산상수훈’에서 ‘깨끗한 마음’‘가난한 마음’‘자비로운 마음’을 설했을까. 그게 하느님 마음의 결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결을 따라가라고 했다. 살과 뼈 사이의 빈 틈으로 칼이 들어갈 때 우리의 삶도 수월해진다. 살코기의 자연스런 결을 따라서 칼을 쓸 때 우리의 삶도 자연스러워진다. “아! 이럴 때는 이쪽으로 칼을 쓰는 거구나” “아하! 그럴 때는 그쪽으로 마음을 쓰는 거구나!” 그런 깨침을 통해 눈이 맑아진다. 눈이 맑아질 때 우리의 몸도, 우리의 삶도 환해진다. 그렇게 내 안에 등불이 켜진다. ‘하느님의 마음’이 켜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갈릴리 호수의 해돋이 풍경.

<10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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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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