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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선영의 노벨상 이야기

2008년 노벨 잔혹사 -더글러스 프래셔의 인생 역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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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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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2008년 노벨 화학상은 해파리를 밤에 번쩍이게 만드는 초록색형광단백질 (GFP)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막상 수상자의 리스트에는 GFP 유전자를 처음으로 분리했던 더글러스 프래셔가 없었다. 3명의 수상자 중 챌피와 치엔 2명은 프래셔로부터 GFP 유전자를 받아서 연구를 시작했다. 프래셔가 없었더라면 이들은 그 연구를 시작할 수 없었거나 경쟁력을 갖지 못해서 노벨상을 못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2008년 노벨 화학상이 발표될 당시 프래셔는 아리조나의 헌츠빌이라는 조그만 도시의 도요타 자동차 딜러 가게에서 고객 편의를 위한 셔틀버스를 모는 기사였기에 그의 스토리는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가 왜 노벨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어쩌다 운전기사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과학도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프래셔는 1979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후 조지아 대학에서 포닥 연구를 수행했다. 이 때 그의 지도교수였던 밀턴 코르미어는 제약회사인 로슈의 지원을 받아 해파리에서 에쿼린이라는 형광단백질의 유전자를 분리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이 연구를 통해 프래셔는 에쿼린 이외에도 GFP 유전자를 일부 분리했다. 그런데 에쿼린은 ‘발색단’이라는 물질의 도움이 있어야만 빛을 내는 반면, GFP는 그 자체 즉 단독으로 발광하는 듯 했다. 따라서 프래셔는 GFP가 실용화에 더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 그는 이미 GFP를 다른 생물체에 넣어 빛을 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험 계획을 세웠다. 챌피를 노벨상으로 이끈 아이디어가 이미 프래셔의 머릿 속에 있었던 것이다.

1987년, 프래셔는 포닥 과정을 마치고 매사추세츠주의 저명한 ‘우즈홀 해양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이 연구소 연구원은 미국의 모든 연구직과 마찬가지로 나중에 정년 심사를 받을 수 있는 직이지, 처음부터 정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해변에 가까운 집도 사고, 정원에서 채소도 기르고, 딸을 낳는 등 그야말로 알콩달콩한 삶이 시작되었다. 프래셔는 미국 암학회에서 20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GFP 유전자의 클로닝을 완성했다. 그 다음 단계는 이 유전자를 박테리아에 집어넣어 형광이 발산되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미국 NIH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여기서부터 프래셔의 인생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까지 밝혀진 모든 발광 단백질은 그 자체로는 빛을 발산하지 못했다. GFP도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는 심사자들의 반대로 프래셔가 연구비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프래셔와 같은 연구소에 있던 시모무라조차도 이같은 의문을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상당수 연구소들에서는 연구비를 독립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프래셔는 GFP 연구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정년심사에서 떨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우즈홀을 떠났다. 그 후 프래셔는 근방에 있는 농무성 산하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년 후 메릴랜드로 가라는 전근 발령을 받았다. 매사추세츠에 이미 자기 집이 있었고 딸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 못해 이사했다. 그러나 새로운 부임지에서 프래셔는 상사와 잘 지내지 못해서 우울한 직장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결국 2004년에 아리조나 헌츠빌에 있는 작은 바이오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불과 1년 반 만에 회사가 문을 닫았고, 그 후 1년간 실업자 생활을 하다가 토요타 딜러 가게에서 셔틀버스 기사 직업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프래셔는 우즈홀을 떠나 GFP 연구를 포기하면서 그 유전자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 주었다. 챌피와 치엔은 모두 프래셔의 DNA를 받아 수상자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프래셔를 스톡홀름 시상식으로 초대했고, 특허에도 이름을 올려주어 몇 만 달러의 로얄티를 받도록 했다. 특히 치엔은 샌디에이고에 직장을 알선해주려고 노력했다.

프래셔의 인생 역정에는 기초 과학자들이 배워야 할 점들이 있다. 먼저 프래셔는 주변 네트워크 활용과 소통에 매우 미숙했다. 예를 들어 당시 우즈홀에는 GFP 단백질 연구의 대가인 시모무라가 있었으나 주니어인 프래셔는 그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같이 일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조지아 대학의 은사인 코르미어도 프래셔가 그런 식으로 우즈홀을 떠난 것을 전혀 몰랐고, 그에게 제약회사의 연구직을 얼마든지 주선해줄 수 있었다고 탄식했다. 프래셔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남에게 도움 청하는 것을 꺼렸다. 실험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대화와 협업 측면에서 그는 빵점 수준이었다.

프래셔는 연구비 신청에서 한 번 탈락하고 전의(戰意)를 완전 상실해서 우즈홀을 떠났다. 연구비나 학술지 발표에서 탈락과 거절은 늘상 있는 일이다. 이 때 상대방이 주는 비평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과학세계에서 다반사인 네거티브 반응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프래셔는 실험과학계에서 필요한 사회적 기술(social skill)과 스트레스로부터의 회복력(resilience)을 갖추지 못해 무너진 것이다. 우리 과학도들이 유념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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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셔에게는 운(運)도 따라 주지 않았다. 지난 번 글에서 밝혔지만 챌피는 1989년에 프래셔에게 전화를 걸어 GFP유전자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1년 후 클로닝을 끝낸 프래셔가 DNA를 보내주려고 챌피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서로 잊고 있다가 2년 후 갑자기 생각난 챌피가 다시 전화하여 유전자를 받은 것은 1992년이었다. 그 때 프래셔는 이미 GFP연구를 포기하고 우즈홀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챌피는 불과 1년 만에 그를 노벨상으로 이끈 실험 결과를 얻었고, 프래셔를 공동저자로 포함한 논문을 쓰고 사이언스지에 발표했다.

만일 프래셔가 1990년 챌피에게 전화했을 때 연락이 닿았더라면, 1년 후인 1991년에 챌피의 실험 결과가 나와 GFP가 단독으로 빛을 낸다는 것을 보여줬을 것이고, 이를 계기로 프래셔는 연구비는 물론 정년보장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프래셔는 GFP 유전자의 ‘발명자’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연구의 주요 참여자로서 노벨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한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는 최대 3인이라는 규정 때문에 오히려 GFP 단백질의 학술적 측면만 연구했던 시모무라는 탈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GFP에 대한 수상은 그 실용성 때문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1990년 한번의 전화 불통은 프래셔를 노벨수상자와 버스기사로 가르는 운명의 분기점이었다.

김선영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