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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관리소장·동 대표가 쌈짓돈처럼 빼먹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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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전국 300가구 이상 아파트는 대부분 지난해 10월까지 외부회계기관의 감사를 받았다.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2014년 9월 아파트 난방비 비리를 폭로하면서 아파트 관리 운영 비리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가 법을 개정해 아파트에 대한 외부회계감사를 의무화했다.

승강기 교체 공사 등 수의계약
증빙서류 남기지 않는 게 관행

외부감사에서 드러난 흔한 문제점은 입주민이 낸 관리비 등 현금 흐름이 투명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북의 한 아파트의 경우 회계장부와 은행 입금액은 1억2000만원 차이가 났다. 외부 감사인은 “횡령이 의심된다”고 보고했다. 회계 처리 부적합 판정을 받은 833개 단지의 지적 사항(1177건) 중 517건(43.9%)이 이처럼 아파트에 들어오고 나가는 현금 흐름이 분명하지 않은 데 있다.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선 부녀회가 아파트 관리 자금 1500만원을 임의로 사용하다 적발됐으며, 서울의 한 아파트 관리회사가 아파트 관리비 통장으로 들어온 돈을 중간에 인출했다가 월말에 다시 입금하는 수법으로 5억원을 무단 유용했다.

현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보여주는 현금흐름표가 없어 부정 여부를 확인하기 힘든 사례도 많았다. 또한 건물 노후화에 대비해 아파트 소유주가 낸 돈을 적립하는 장기수선충당금에서 써야 할 돈을 쓰지 않고 아파트 관리비로 부과해 입주민에게 부담 지우는 일도 흔하게 나타났다.

이번 외부회계감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모든 아파트단지가 관리비를 고의로 횡령하기 위해 증빙서류를 남기지 않았거나 회계 처리를 누락했다고 단정하긴 힘들다. 하지만 관리비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아파트 관리비는 전국적으로 연간 12조원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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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교통부가 이번 회계감사와 별개로 전국 17개 시·도 및 기초지방자치단체와 합동으로 지난해 10∼12월 주민 민원이 많던 아파트단지 429곳을 감사했다. 그 결과 이 중 72%인 312개 단지에서 비위 또는 부적정 사례가 확인됐다. 서울의 한 아파트는 200만원 이상의 공사를 할 때 경쟁입찰을 해야 하는 규정을 어기고 수의계약 형태로 특정 업체에 승강기 보수 교체 공사를 맡기고 1600만원을 지급했다. 경남의 한 아파트에선 전·현 입주자대표 간의 내부 갈등으로 소송이 일어나자 소송 비용 1400만원을 관리비에서 냈다.

경찰청도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간 관리 비리를 특별단속해 43건에 걸쳐 아파트 관리소장 등 153명을 최근 입건했다. 경찰 조사 결과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선 동 대표가 주민 공동시설인 피트니스 운영업체를 선정하면서 업체로부터 3000만원을 로비 자금으로 받은 것으로 드러나 구속됐다.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부패척결단 박순철 부단장은 이날 “이번 감사에서 부조리·비리 등의 문제가 드러난 단지는 해당 지자체를 통해 집중 감사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아파트에 대한 외부감사 결과를 감독기관인 지자체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기로 했다.

의무화된 외부회계감사가 아파트 관리 비리를 뿌리 뽑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심교언 교수는 “숫자 맞추기식 감사로는 한계가 있으며 회계사인 주민이 아파트 관리에 적극 참여하는 등 주민자치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www.k-apt.go.kr)’에서 감사보고서를 열람하는 것도 참여 방안 중 하나다.

경기대 건축공학과 최용화 교수도 “이번에 시행된 회계감사는 회계사들이 서류를 검토해 숫자를 맞춰보는 식으로 진행된 측면이 강하다”며 “회계감사에 대한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들고 주민들이 그 결과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회계감사제가 자칫 형식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시윤·황정일·윤정민 기자 sung.si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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