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현대적 개발은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이 발표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남산 1·2호 터널, 제3한강교(한남대교), 강변북로 등 속도를 중시한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서울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사이 역사와 전통이 서려 있던 장소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반세기 동안 꿋꿋이 제 모습을 간직해온 장소, 그리고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땀·눈물·웃음을 ‘서울은 깊다’ 코너에 담는다.
서울은 깊다 ① 대조동 51년 된 불광대장간
‘땅 땅 땅’. 쇠메(쇠망치)가 모루(작업용 쇠받침대)에 부딪치자 청랑한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쇳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박자는 행진곡처럼 경쾌하다. 쇠뭉치를 자르고, 두드리는 손놀림이 날래다. 화로에 넣고, 빼고, 다시 두드리고… 노인의 머리에서 땀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 ‘불광대장간’의 50여 년 주인 박경원(78)씨다.
지난달 25일 오후 찾아간 서울 은평구 대조동 16㎡의 좁은 공간은 후끈했다. 무쇠도 녹이는 1만 도의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이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만 회가 넘는 쇠멧질을 받아내는 모루와 이곳에서 태어난 호미·낫·쇠스랑·도끼 등 각종 연장들로 가득했다. 10여m를 격한 바깥을 보니 첨단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자동차가 질주하고 휴대전화를 손에 쥔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다. 반면 오래전에 시간이 멈춘 듯 박씨와 아들 상범(48)씨는 이곳에서 김홍도의 풍속화 ‘대장간’에 나오는 대장과 야장처럼 쇠를 부리고 있다. 쇠를 잡는 대장은 박씨, 쇠를 내려치는 야장은 상범씨 역할이다.
박씨가 손에 망치를 잡은 건 올해로 66년째다.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박씨는 “열두 살 때 6·25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나 신갈(용인)로 피란을 왔다가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대장간 허드렛일을 한 게 시작”이라고 기억했다. 휴전 후 미아동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고 ‘불광대장간’ 간판을 내건 건 65년부터다. 당시 한창이던 전후 복구사업과 개발사업이 맞물리면서 건축 연장을 찾는 수요가 많았다고 한다. 박씨는 “그때는 여기뿐 아니라 삼성동, 구파발, 아현동, 서울역 등 곳곳에 제법 규모가 큰 대장간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공장에서 찍어내는 값싼 도구들이 쏟아지면서 쇠메 소리는 하나둘 사라져갔다.
불광대장간도 한때 1500만원에 달했던 월 매출이 700만원대로 떨어졌다. 그래도 문을 닫지 않은 건 ‘품질’ 덕분이란다. 박씨는 “양평이나 파주에서 찾아와주는 손님들 덕분에 버틴다. 그런 분들이 찾아오면 ‘야, 이건 그만둘 수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기운이 솟는다”고 말했다. 상범씨는 “모든 제품에 ‘불광’이라는 두 글자 낙관을 선명하게 새기는 건 무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박씨의 대장장이 인생에서 가장 아끼는 연장은 20여 년 사용한 ‘망치제작용’ 정이다. 그런데 15년 전 상범씨의 실수로 정의 한쪽 끝이 부러졌다고 한다. “너무 가슴이 아파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는 박씨는 여전히 그 못 쓰는 정을 연장도구에 넣어두고 있다.
몇십 년 단골손님이 많지만 최근 들어서는 도시농업이 인기를 끌면서 젊은 층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날 대장간을 찾은 최혜영(29·여)씨는 “아파트 앞 텃밭에서 쓸 호미를 사러 왔다”며 1만5000원을 주고 호미 3개를 사갔다. 아웃도어용품을 주문하는 손님들도 있다.
상범씨는 군 제대 후 잠깐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이게 ‘블루오션’이라는 생각과 전통 기술자라는 자부심도 있다”며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3대째 가업으로 이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바람은 딱 하나죠. 여기서 계속 대장간을 하면서 또다시 20년이 지나도 물건 사러 오는 손님들 맞는 거죠.”
글=유성운 기자·김준승 인턴기자(동국대 4) pirate@joongang.co.kr
사진=김현동 기자
※시리즈 제목 ‘서울은 깊다’는 역사학자 전우용의 저서 『서울은 깊다』(돌베게)에서 차용했습니다. 사용을 허가해주신 저자와 출판사 측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