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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짓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건축가의 싱크탱크 연구소

중앙일보

입력

 
건물을 짓고 싶어 건축가를 만났다. 어디에 무슨 용도의 건축물을 짓고 싶은 지 말했다. 꿈을 현실화해 줄 건축가의 답을 들을 차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건물을 짓는 게 최고의 답이 아닙니다(Building is not the best answer).”
건물을 짓겠다는 건축주를 말리는 건축가라니, 넌세스 같지만 실화다. 2001년 유럽연합(EU)은 벨기에 브뤼셀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를 기념한 상징적인 건물을 짓길 원했다.

네덜란드 건축가 렘 쿨하스의 사무실(OMA, 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을 찾았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엄밀히 렘 쿨하스가 운영하고 있는 싱크탱크 연구소 ‘AMO(Architecture for Metropolitan Office)’에서 낸 의견이다.

그들은 EU의 수도 선정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띄는 만큼 물리적인 건물을 짓기보다 유럽의 역사를 전시할 수 있는 임시 텐트를 제안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커스 텐트’는 수년간 벨기에,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유럽의 역사를 되새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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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수도 벨기에 브뤼셀의 오랜된 건물 사이에 들어선 ‘서커스 텐트’. 텐트의 알록달록한 무늬는 EU의 각 나라들의 국기를 바 코드처럼 나열해 이미지화했다. [사진 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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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텐트의 내부 모습. 유럽의 역사를 그래픽으로 만들어 텐트 벽에 전시했다.

전 세계적으로 별도의 싱크탱크를 두고 있는 건축사무실은 드물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2008년)이기도 한 렘 쿨하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AMO를 운영하고 있다. AMO의 대표, 레이니어 드 그라프(52)를 최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저널리스트, 역사가, 건축가 등 AMO에는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있고 메가시티, 재생 에너지, 첨단 테크놀로지, 정치 이슈 등 건축을 넘어 모든 것을 연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OMA를 거꾸로 뒤집으면 AMO가 된다. 건물 설계 외의 일을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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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는 유럽의 나라를 풍력, 태양열 등 주요 재생 에너지를 중심으로 다시 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유럽의 지도, ‘에네로파(Eneropa)’다.

AMO가 2010년 진행한 유럽기후변화재단(ECF)의 프로젝트는 이 싱크탱크의 융복합적인 연구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EU 국가들이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의 80%를 감축할 수 있는 방법으로, AMO는 ‘에네로파(Eneropa)’를 제안했다.

영국의 바람, 스페인의 태양 등 EU의 각 나라가 갖고 있는 재생 에너지를 연결해 하나의 전력 네트워크를 만드는 안이었다. 에너지별로 나라를 구분한 이 프로젝트는 영국 가디언 등 유럽의 유력 매체에 앞다퉈 소개됐다. 드 그라프는 “우리는 모든 고정관념을 재정의(Redefinition)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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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애틀 도서관은 책이 쌓여 있는 창고 같은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와서 노는 도서관으로 도서관의 기능을 재정의해 지어졌다.

렘 쿨하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미국 씨애틀 도서관(2004년)도 AMO의 ‘재정의’를 거쳐 설계했다. 드 그라프는 “21세기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로, 사람들이 더이상 책을 읽지 않아 ‘책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도서관의 기능을 재정의했다. 책을 쌓아두는 단순한 창고에서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교류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돼야 한다고 봤다. 그는 “커다란 건물 안에 공간(상자)들을 쌓고 층마다 공공 공간이 만들어 지게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교보문고가 서울 광화문점을 리모델링하면서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대폭 늘린 것과 맥락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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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애틀 도서관은 커다란 건물 안에 필요한 도서관의 공간(상자)을 쌓고 그 사이사이마다 공공 공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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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의 오랜 단골은 미우치아 프라다다. 그는 AMO에 도쿄와 LA 등에 새로 만들 프라다 매장 디자인을 맡기러 왔다가, 패션쇼, 룩북(LookBook) 등의 디자인까지 모두 맡겼다. 프라다 예술 재단이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 남부 술 공장 부지를 개조해 만든 복합예술공간도 AMO가 아이디어를 내고 OMA가 현실화시킨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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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공장의 기존 건물 7개에 3개의 새 건물을 지어서 완성한 프라다의 복합예술공간 ‘행거비코카(HangarBicocca)’.

드 그라프는 방한 일정 중에 서울시청에서 서울시 공공 건축가,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을 대상으로 ‘아시아의 세기’를 주제로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급성장하고 있는 아시아의 도시를 새로운 현대화의 현상으로 봤다.

“AMO는 ‘현대화(modernization)’를 연구합니다. 서구에서는 현대화를 노출 콘크리트, 유리 같은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더이상 연구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메가 시티’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화는 진행되고 있는 인간 진화의 과정입니다. 이를 관찰하고 이론화해서 건축에 적용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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