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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5000년 바둑의 신비를 건 세기의 다섯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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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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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길까, 인간 대표 이세돌 9단이 이길까. 이 역사적 대결이 처음 발표됐을 때만 해도 다들 이세돌 9단의 압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알파고의 우세를 점치는 쪽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솔직히 걱정된다. 이세돌이 진다면 5000년 바둑의 신비도 사라질지 모른다.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도 어딘지 공허해진다. 문득 다른 직업은 거진 다 사라지고 군인들만 우글거리는 미래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구글이라는 회사는 진정 놀라운 존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세돌의 5대0 승리를 믿고 있다.

알파고는 지난해 10월 중국 프로이자 유럽챔피언인 판후이 2단을 5대0으로 꺾으며 사상 처음 인간 고수의 영역에 들어섰다. 기보를 보면 최정상 기사와는 아직 차이가 많다. 굳이 치수를 잰다면 정선(定先) 정도 될까? 그러나 알파고가 상대에 따라 기량과 승부를 조절한다는 분석이 있다. 무조건 최선의 수를 두는 게 아니라 승리 위주로 바둑을 둔다는 것이다. 더구나 알파고는 계속 실력이 늘고 있다. 개발자인 구글 딥마인드의 하사비스 대표는 이번 승부를 50대50이라고 말했다. 이 50%에 겸손이 담겼다고 볼 때 실로 놀라운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바둑 얘기를 해 보자. 바둑은 기억력이 중요하다. 수만 가지 정석과 사활, 맥 등을 기억해야 한다. 기보도 외워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경지에 들어서면 이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고정관념에 빠져 상상과 창의의 세계, 즉 고수의 세계로 나갈 수 없다. 소위 ‘나의 바둑’을 둘 수 없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알파고는 천만 가지 수를 영원히 기억할 텐데 그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러고도 고수 특유의 창의가 가능할까. 이건 순전히 기계를 모르는 인간의 의문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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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엔 제아무리 고수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참 많다. 지금은 타협할 때인가 싸울 때인가. 공격의 타이밍, 또 승부수의 타이밍은 언제인가.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다 알면 바둑의 신이 되겠지만 인간이기에 이런 결정에는 ‘감각’이란 게 필요하다. 수읽기나 계산력 외에 자동적으로 나를 이끄는 그 어떤 것이 감각이다.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몇 개가 척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첫눈에 떠오르는 제일감(第一感 )은 인간관계의 첫인상처럼 한 판의 바둑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고수들이 저마다 다른 기풍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알파고는 바로 인간처럼 그 감각을 배양 중이라고 한다. 실제 판후이와의 대국에서도 그 감각이 느껴진다. 우주의 원자보다 많다던 바둑의 경우의 수를 단번에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1000년 걸릴 훈련을 불과 몇 주 만에 해치운다는 소식에 더욱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천재들은 바둑을 배운 지 불과 몇 년 안에 고수가 된다. 천재들은 8~9세 때 바둑을 배워 11~12세면 프로가 되고 20세를 전후해 세계 챔프가 된다. 감각은 훈련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알파고는 어떨까. 만약 알파고의 재능이 천재급이라면 알파고는 벌써 바둑의 신이 되었을 것이다.

기보를 본다면 알파고의 감각이 천재급은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알파고의 인공지능은 ‘재능’이라고 할 만한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재능을 지닌 인간도 몇십 배 더 훈련하면 천재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기계는 어떨까. 지능 자체가 높아지지 않는 한 1000만 판을 두어도 다람쥐 쳇바퀴 돌기라는 게 기계를 잘 모르는 내 생각이다.

알파고의 장점은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진다는 점이다. 돌이 많아질수록 정밀해지고 종반에 다다르면 더욱 빈틈이 없어질 것이다. 알파고는 체력이 무한대고 태생적으로 부동심(不動心)을 터득해 심리전에서도 무적이다. 이세돌은 지난 1일 중국으로 가 한·중·일 국가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 최종라운드에 출전했다. 한국 선수론 혼자 남은 그는 일본과 중국 선수 3명을 꺾은 뒤 마지막 대국에서 난적 커제에게 졌다. 최고수들을 상대로 3승1패면 잘한 것이지만 우승컵을 중국에 넘긴 아픔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6일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소화한 다음 9일부터는 다섯 판을 잇따라 둬야 한다. 알파고는 이 순간에도 농심배의 이세돌 기보들을 연구하고 실전을 통해 소화하고 있을 것이다.

감정 없는 기계와의 대결이지만 기세가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판후이는 알파고와 큰 실력 차이가 아님에도 의심과 두려움으로 자멸한 감이 짙다. 두려워하면 진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인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발휘해야 승리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바둑을 구사하는 이세돌 9단은 최적의 인간 대표다. 그는 알파고가 예상 외의 실력을 보일 때에도 특유의 상상력으로 변화를 이끌 것이고 기세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