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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5년, 딸기 한 알의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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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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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도쿄 특파원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가 강타한 미야기(宮城)현 야마모토초(山元町). 집과 건물은 높이 10m 흙탕물에 떠내려갔고 마을의 40%가 물에 잠겼다. 주민 1만6711명 중 4%인 63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재민도 9000명에 달했다. 수습된 시신들은 공동 매장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농경지와 공장, 상가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는 등 삶의 터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하나 둘씩 고향을 등졌다. 4000명가량 떠났고 5년이 흐른 지금 1만2566명이 남았다.

최근 야마모토초를 찾았다. 쓰나미의 흔적은 쉽게 발견됐다. 빈 집터와 황무지처럼 방치된 논밭, 가설 주택에서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는 일부 주민들. 시간은 빠르게 흘렀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동일본 대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야마모토초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딸기 주산지였다. 그런데 딸기 농지 95%가 거센 파도에 휩쓸리면서 농민들은 절망에 빠졌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던 상황. 벼랑 끝에서 이들을 구한 건 농사 경험이 전혀 없던 벤처기업가였다. 이와사 히로키(岩佐大輝·38)는 도쿄의 IT기업을 접고 고향 사람들 곁으로 내려왔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부흥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라고 묻고 또 물었다.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질문을 바꾸자 곧 문제가 풀렸다. “마을의 자랑거리가 뭐였죠?”라고 묻자 주민들은 입을 모아 “딸기”라고 외쳤다.

2012년 1월 농업 생산법인 ‘GRA’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와사는 벤처기업의 경영 노하우와 IT 기술을 살려 딸기 농사의 선진 모델을 만들었다. 고품질 딸기를 재배하기 위해 가장 신경을 쓴 건 온실 제어 시스템. 기온과 습도, 일조 시간을 농민들의 경험과 감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딸기 장인들의 조언을 얻어 데이터를 모은 뒤 컴퓨터 제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직원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재배 환경을 관리할 뿐이다.

1m 높이의 재배 선반에서 빨간 딸기가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자랐다. 보통 딸기에 비해 당도가 1.5~2배 이상 높고 빛깔이 예뻐 ‘미가키(磨き·윤기 나는) 딸기’라는 독자 브랜드로 도쿄 백화점에서 한 알에 1000엔(약 1만원)씩 팔렸다. 다이아몬드 로고가 붙은 예쁜 케이스에 담겨 ‘먹는 보석’이 됐다. 양조시설도 만들고 있다. 딸기 와인은 물론 포도주와 사과주도 생산할 계획이다. 연중 재배시설 ‘ICHIGO WORLD’(딸기 세계)엔 국내외 농민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이와사 GRA 대표는 다른 쓰나미 피해 지역인 이와테(岩手)현 고등학교를 찾았다.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든 안 되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지 말고 도전하라”고 충고했다. “최초의 한 걸음이 사람도 돈도 움직인다”고 말했다. 10년 안에 1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딸기 한 알의 희망이 부흥을 넘어 미래의 꿈으로 이어졌다.

이정헌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