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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개굴욕, 아이고 죽겠네…‘미국 B급유머’가 쏙쏙 들어오네 영화 번역가 황석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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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번역가 황석희(왼쪽)는 활동 중인 극장 외화 번역가 중 젊은 편에 속한다. 톡톡 튀는 감각으로 수퍼 히어로 데드풀(오른쪽)의 B급 유머를 재치있게 살려냈다. [사진 라희찬(STUDIO 706)]

수퍼 히어로 영화 ‘데드풀’(원제 Deadpool, 팀 밀러 감독)이 관객 수 290만 명을 넘겼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지만 차진 욕설과 야한 농담 등으로 말맛을 살린 자막이 흥행의 큰 비결로 꼽힌다.

영화 번역가 황석희

온라인에는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다’ ‘최고의 번역이다’는 관람객들의 댓글이 줄잇고 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도대체 누가 번역 했는지 크레딧의 이름을 확인하러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이 많다는 얘기도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의 한 극장에서는 번역가와 관객들이 만나는 특별 이벤트가 열렸다. ‘데드풀’ 번역의 주인공은 황석희(37)씨. 최근 ‘캐롤’ ‘스포트라이트’ 등을 포함해 이제껏 100편이 넘는 외화를 번역해 왔다. ‘데드풀’ 인기의 숨은 공신인 그를 만났다.

 - 번역 전에 데드풀의 캐릭터 알고 있었나.

 “일본 애니메이션·게임·수퍼 히어로 영화 등을 섭렵해온 데다 원래 ‘덕후’ 기질이 좀 있어서 알고 있었다. 번역 제안을 받고 기쁘기도 했지만, 데드풀의 대사처럼 ‘X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 입담이 센 캐릭터라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중압감이 정말 심했다. 초능력보다 ‘말빨’로 먹고 사는 데드풀이니까! 원체 수위 높은 농담과 욕설을 내뱉으니 어떻게 번역해도 배급사와 원작 팬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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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 국내 개봉작 중 파격적인 번역이었다.

 “사제 폭탄을 해체하는 기분이었다. 막상 해체하자니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막막한 폭탄. ‘맥베스’(2015·저스틴 커젤 감독)나 ‘캐롤’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자막 번역이 더 쉽다. 상당 부분 수정될 걸 각오하고, 하고 싶은 대로 번역했는데 90% 정도가 덜컥 통과됐다.”

 - ‘데드풀’ 번역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쓴 점은.

 “관객의 문화 이해도를 무시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조석, 이말년처럼 유머 감각과 ‘말맛’이 뛰어난 웹툰 작가들의 만화를 자주 찾아봤다. SNS에 ‘조석신(神), 이말년신이시여, 오늘 하루만 내게 ‘드립신’으로 강림하소서’라고 쓴 적도 있다(웃음).”

 - 극장에서 관객 반응을 본 소감은.

 “관객이 웃는 걸 보고 큰 힘을 얻었다. ‘데드풀’ 관련 댓글 중 가장 높은 추천을 받은 게 ‘번역가 상 줘라’다. 그 댓글을 인쇄해서 벽에 걸어 놓을 작정이다(웃음). 오역과 실수는 줄이려 최대한 노력하지만 완벽할 순 없다. 나중에 실수하고 욕먹을 때 이 글을 보며 위안을 삼아야겠다.”

 - 영화 번역일을 한 지 얼마나 됐나.

 “영상 번역 경력은 총 10년 정도다. 케이블 TV에서 6년 정도 드라마를 번역했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건 3년 전쯤부터다. 대부분의 영상 번역가들은 영화 번역을 꿈꾼다. 나 또한 그랬다.”

 - 영화 번역가 지망생들에게 조언한다면.

 “영화 번역가가 되는 문턱은 무척 좁다. 모두 합쳐도 다섯 명이 안 된다.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번역을 하고 싶다면 기회가 올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학벌이나 인맥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란 건 내가 증명했다. 나는 강원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왔고, 유학파도 아닌데다, 영화계 인맥도 없었으니까. 만화·영화·B급 문화 등 닥치는 대로 섭렵하고, 다른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을 보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 나가야 한다.”

 - 블로그, SNS 로 관객과 교류하고 있는데.

 “영화 번역은 내게 직업 이상이다. 이걸 ‘덕업일치(취미가 직업으로 이어진 상태)’라고들 한다(웃음). 영화만 번역하면 그냥 ‘일’이겠지만, 한 영화를 두고 관객과 함께 덕질을 하며 수다 떨면 그건 ‘삶’이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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