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알파고, 인공지능 그리고 일자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사 이미지

나현철
논설위원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을 처음 접한 건 30년 전이다. 군대를 다녀온 뒤 당시로선 첨단인 286AT 컴퓨터를 장만했지만 마땅히 돌릴 프로그램이 없었다. 컴퓨터 판매점에서 무단 복사해온 게임을 하나씩 해보다가 ‘The Many Faces of Go’란 녀석과 맞닥뜨렸다. 일본에서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인데 당시로선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인간 두뇌 영역까지 도전하게 된 인공지능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고민 더 깊게 할 것

 하지만 실력이 기대 이하였다. 아마추어 급수도 모르는 내가 고수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초반 포석과 정석은 몰라도 행마와 사활 같은 영역에선 오목을 두는 듯했다. “체스도 아닌 바둑은 컴퓨터가 인간을 당해낼 수 없다”는 선입견이 그때 자리 잡았다.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우주 의 수소 원자 수는 약 10의 80승 개라고 한다. 바둑에서 경우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10의 360승 개 다. 더구나 이는 형세판단이나 대세감각, 승부수처럼 수치화하기 어려운 인간의 선택으로 조합된다. 고작 0과 1밖에 모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따라잡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런데 ‘알파고(AlphaGo)’ 앞에서 이런 생각이 깨졌다. 다음주 인간 대표인 이세돌 9단과 대국하는 알파고는 ‘강화학습’이라는 인공지능으로 무장했다. 4000만 판의 실전 대국을 기초로 끊임없이 유불리를 측정하고 최선의 수를 찾아낸다. 공개된 기보를 보니 단순히 입력된 걸 뱉어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인간처럼 예측하고 판단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미 알파고는 다른 바둑 프로그램과의 대결에서 499승 1패를 기록해 ‘바둑 프로그램의 갑(甲)’으로 등극했다. 이 9단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한다면 알파고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둑의 갑’이 될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승부 예측이 이 9단에게 유리한 편이다. 그러나 알파고의 기보를 봐온 프로 고수들은 2년 전 개발된 이 프로그램의 실력 향상 속도가 무섭다고 평한다. 그리고 대체로 짧게는 내년, 길게는 5년 내에 알파고가 바둑계의 최강자가 되리라고 예측한다. 바둑계엔 좋지 않은 소식이다. 바둑을 배우려는 사람이 바둑교실에 가는 대신 프로그램을 살 테니 말이다. 자칫 바둑에 대한 관심이 줄고 프로기사를 포함한 많은 바둑인이 실업자가 될지 모를 일이다.

 이런 걱정은 이미 바둑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인간이 기계로 대체되는 추세는 갈수록 넓고 깊어지고 있다. 요즘 지어진 자동차 공장은 20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공정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은 한참 전에 사라졌다. 부품을 옮기고 조립하고 용접하는 일 대부분을 로봇이 한다. 사람은 주로 최종 조립단계에서만 손을 거들 뿐이다. 최근엔 기계와 AI가 결합해 사람의 손발은 물론 일부 두뇌 기능까지 대체하기 시작했다. 『초지능(superintelligence)』을 쓴 영국 옥스퍼드대의 AI 전문가 닉 보스트롬은 아예 “다음 세기에는 AI가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꼭 반길 일은 아니다. 일자리에 대한 고민이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일에서 전문직까지 수많은 직업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은 AI와 사물인터넷 등 다양한 기술이 융합함으로써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며 “일자리 측면에선 재앙”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5년간 세계 주요 15개국에서 70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210만 개만 새로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세를 막을 순 없다. 과학과 기술 진보를 막으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대부분 실패했다. 변화에 적응하면서 그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근로자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에도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고용을 창출하지 못하는 기업의 사회적 평판과 입지가 약화되는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임금을 통해 기업과 가계, 생산과 소비를 연결시키는 정부의 정책 능력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나 샌더스 돌풍의 이면에도 이 같은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어쩌면 WEF의 말대로 “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정치까지 달라지는 새로운 혁명”이 진행 중인지 모른다. 그리고 알파고와 이 9단의 대국은 이런 혁명이 우리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상징일 수 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벤트로만 이번 대국을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각설하고, 이 9단의 승리를 빈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