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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황제 200점 친 당구, 하루 160만명 국민 레저로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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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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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 여신’으로 불리는 아마추어 한주희 씨. TV에서 당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는 4구 기준으로 200점 이상을 치는 실력자다. [중앙포토]

자욱한 담배 연기, 동네 건달들의 아지트. 얼마 전까지만해도 당구장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랬다. 그렇지만 당구(撞球)는 원래 귀족 스포츠였다.

남녀노소 찾는 당구장의 변신

당구는 17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고, 순종 황제도 옥돌로 만든 당구대에서 당구를 즐겼다는 문헌이 있다. 순종의 실력은 4구(四球) 기준으로 100~200점 정도로 알려진다.

 2016년 대한민국 당구는 남성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남녀노소가 즐기는 국민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당구 여신’으로 불리는 한주희(32)씨는 어머니가 당구장을 운영해 2010년 자연스레 당구를 접한 경우다. 2014년 아마추어 당구대회 심판을 맡았다가 TV 중계화면에 포착돼 ‘당구 여신’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에버리지 0.4(4구 환산 200점 이상)인 한씨는 “당구를 처음 배울 때는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당구대가 그려질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PC방이 인기를 끌었던 2000년대 초반 1만8000개까지 줄었던 당구장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해 2014년 기준으로 전국에 2만2655개가 있다. 체육시설(5만6124개) 중 4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1위다. 체육 도장(25%·1만3905개)과 골프연습장(17%·9779개)보다 많다. 전국에 당구대 15만9314개, 큐(cue·긴 나무막대) 100만개가 있다.

인구수 대비 시설 인프라도 세계 1위다. 하루 평균 당구장 이용객은 160만명으로 추산된다. 요즘 당구장 이용료는 10분에 평균 1500원~2000원 정도다. 4명이 2시간을 즐겨도 2만원 안팎이다. 중·장년층에게도 부담없는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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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고양에서 열린 시니어 대회에 참가한 중·장년 당구 애호가. [사진 대한당구연맹]

반면 경기도 일산의 포켓볼 당구장은 클럽을 방불케 한다. 화려한 음악과 조명에 맥주까지 마시면서 당구를 즐길 수 있다. 주 이용객은 20~30대 여성이다.

 1909년 국내에 들어온 당구는 100년 가까이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5년 대한체육회 정가맹단체가 됐다. 2009년부터는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으로도 채택됐다.

국내에선 서울대 출신 고(故) 이상천(1954~2004) 선수가 선구자다. 국내 당구계를 평정한 뒤 1987년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상 리(Sang Lee)’란 이름으로 활약했다. 2001년까지 12년 연속 미국당구선수권을 제패했다.

1999년 뉴욕타임스는 미국프로농구 마이클 조던(53)에 빗대 ‘상 리는 당구계의 조던’이라고 극찬했다. 이상천을 보고 꿈을 키운 ‘이상천 키즈(kids)’들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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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을 방불케하는 포켓볼 당구장. 화려한 음악과 조명에 맥주까지 마시면서 당구를 즐길 수 있다. 주 이용객은 20~30대 여성이다.

여러가지 당구 종목(캐럼·풀·잉글리시 빌리아드·스누커) 가운데 한국은 캐럼의 한 종목인 스리쿠션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스리쿠션은 공격자의 공인 수구(手球)를 큐로 쳐서 제1 적구(的球)와 제2 적구를 맞히는 동안 당구대 사면의 쿠션을 3회 이상 닿아야하는 게임이다.

 최성원(39·부산시체육회)은 2014년 국내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스리쿠션선수권을 제패했고, 2015년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김행직(24·전남당구연맹)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세계주니어선수권을 3연패했다. 올해 기준 세계랭킹 100위 안에 한국선수가 14명이다. 김행직은 “이상천 선생님 덕분에 한국 당구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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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 U+는 지난해 11월 우승상금 5000만원가 걸린 세계대회를 개최했다. 이성혁 대한당구연맹 전무이사는 “후원계약과 상금 등을 포함해 연수입이 1억원을 넘는 선수들도 나왔다. 김행직을 배출한 수원 매탄고 등 당구 엘리트를 육성하는 중고등학교가 전국에 6개로 늘었다”고 전했다.

 2014년에는 세계 최초로 24시간 당구전문채널 빌리어즈TV가 개국했다. 2014년 시청률 조사기관인 TNMS의 스포츠 평균시청률 분석에 따르면 당구(0.368%)는 프로야구(0.953%)와 프로배구(0.824%)에 이어 세 번째로 시청률이 높았다. 프로축구(0.352%)와 프로농구(0.301%)를 앞질렀다. 경기당 시청자 수가 13만명을 넘을 때도 있다.

당구 여신 한주희 씨는 “당구는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스포츠다. 치매 예방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당신(당구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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