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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는 멸종되게 놔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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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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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사라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 못해 도태된 공룡처럼 불운한 생명체가 있고, 한때 시대의 총아였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명운을 다하고만 페이저나 브라운관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있다. 대체로 적자생존의 자연계 이론이 적용되지만 거꾸로 힘만 믿고 자만하다 약삭빠른 약자에게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된 네안데르탈인이 그렇다.

산업사회에나 걸맞은 정당정치
기력 다했는데 국고로 연명치료
정보사회 맞는 새로운 정치결사
세계 최초로 우리가 만들어보자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은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컸고 호모사피엔스보다 성능 좋은 창을 만들어 썼다. 그런데도 현생인류에게 자리를 내주고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건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현실 대처능력이 뛰어나다 보니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허약했던 우리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됐다. 5000년 전 거대한 얼음공기층이 유라시아 대륙을 덮쳤을 때 네안데르탈인은 쓰러졌지만 우리 조상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의 상상력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움막을 창조해낸 것이다.

 유형의 것들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무형인 제도(制度) 역시 시대의 요구를 따르지 못하면 도태를 피하지 못한다. 신정(神政)이나 왕정, 좀더 가까이 유신체제의 종언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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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그런데 우리 눈앞에 공룡처럼 둔한 움직임으로 그런 귀결을 향해 가는 (무형의) 존재가 있다. 냉기가 코 끝에 닿았는데도, 남들 다 아는 운명을 자기만 모른다. 바로 정당(政黨) 말이다. 아무리 봐도 생명력이 없는데 헌법기관이라는 인공호흡기와 국고보조라는 수액주사로 연명치료를 하고 있을 뿐이다.

 나만의 생각도 아니고 우리만의 얘기도 아니다. 미국잡지 포린폴리시가 2040년에 사라질 것 중 첫 번째로 정당을 꼽은 게 거의 10년 전이다. 지금 다시 꼽는다면 시기를 훨씬 앞당길 게 분명하다. 2020년대에 국회의원들이 멸종동물이 될 거라 예견한 미래학자들이 적잖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도 얼마 전 특집기사 ‘정당정치 없어도 될까’에서 정당의 암울한 미래를 짚었다.

 정당이 멸종의 위기를 맞게 된 것 역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탓이다. 프랑스 집권 사회당의 싱크탱크인 장 조레스 재단의 질 팽셸스타인 이사장이 그 사정을 한마디로 진단한다. “과거 정당의 4대 기능 가운데 정보 수집과 정치 학습, 정책 수립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정당이 현대정치의 대표선수를 자임하고 있지만 사실 정당은 산업혁명의 부산물이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직업과 사회계급에 따라 재편된 ‘개인들’의 연대다. 집단적 의사표현이라는 본질적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후기산업사회에 산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회계급으로 구분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이해관계와 관심사,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극히 세분화된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며 사안에 따라 복잡하게 중첩된 정체성을 느낀다. 어떤 이슈는 새누리당에 동조하지만 다른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고도화된 정보화사회로 들어서면서 개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잘 대변하지도 못하는) 정당을 찾지 않고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예컨대 많은 비정부기구(NGO)들이 공공정책 수립이나 법 제정을 위해 정당을 찾아가지 않고 직접 정부를 상대한다.

 정당에 마지막으로 남은 기능이 정치적 대표 선출 기능이다. 이른바 공천권이라는 건데 그것 역시 희석된 지 오래며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지금 이 땅의 정당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국회의원 공천 방법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외부인사를 불러 맡기거나 일반 유권자들에게 기댄다. 당원을 배제한 채 100%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주장도 나오는데 감동적이지 않다. 다양한 계층의 의사를 대변하려는 시도보다 특정계파들의 이익 충돌의 결과라는 게 먼저 읽히는 까닭이다. 그렇잖아도 자신이 잘 대표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은 더욱 등을 돌린다. 멸종을 향해 소용돌이치는 악순환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미국 대선을 봐도 그렇다. 미국을 대표하는 두 정당 모두 자기들의 정책 스펙트럼에서 크게 벗어나는 후보들의 질주를 속수무책 쳐다보고 있다. 민주당은 그렇다 쳐도 공화당은 자칫 극우정당에서나 볼 법한 인물을 대선후보로 내세워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생겼다. 유권자들이 정당을 따질 이유가 없다. 프랑스처럼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이 높은 나라에서도 정당의 존재이유는 증발하고 있다. 사회당이나 야당인 대중운동연합(UMP, 2015년 해산 후 공화당으로 재창당) 모두 2007년에 비해 당원 수가 반 토막 났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명력이 다한 정당을 세금을 들여가면서까지 연명치료를 할 게 아니라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보내줘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그때를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겠나. 세상이 바뀌면 그 세상에 맞는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오늘의 시대착오적 정당들이 현대사회에 맞는 새로운 정치결사체가 나오는 걸 가로막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헌법을 고치든 국고보조금을 없애든 뭔가 극약처방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걸 할 주체가 국회의원들이라 난망이긴 하지만 시대흐름의 큰 파도 앞에선 그들도 도리가 없다. 그런 게 진정한 정치개혁이고 그런 걸 우리가 세계 최초로 해보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