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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⑦ 예수는 좌파일까, 우파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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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야 했고, 로마의 황제가 그려진 동전을 써야 했다. 그들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은 다신교를 믿는 나라였다. 태양을 숭배하고, 동물을 숭배하던 민족이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이가 세웠다는 나라가 로마였다. 당시 로마에는 곳곳에 늑대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 레무스와 로물루스의 조각상이 있었다. 유일신을 믿던 유대 민족은 극도의 모멸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구약의 모세 시절,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신을 믿었다. 유대인의 눈에는 우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던 암흑의 시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유대인들은 독립을 꿈꾸었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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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포인터(1836~1919)의 1867년작 ‘이집트의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채찍질을 당하며 이집트인의 신전을 짓고, 우상을 세웠을 터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대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이 있었다. 로마 제국에 맞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열심당(熱心黨)’이었다. 예수가 활동한 주무대였던 갈릴리 일대는 열심당의 근거지였다. 그곳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반골 기질’이 강했다. 예수 주위에도, 예수의 설교를 듣는 이들 중에도 열심당원들이 꽤 있었다. 실제 예수의 제자 중 시몬도 열심당원이었다. 예수를 배신한 갸롯 유다 역시 열심당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수시로 예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왜 유대 민족을 식민지 백성의 처지에서 해방 시키지 않느냐고.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하느냐고 따지지 않았을까.

그런 유대인들에게 ‘무력 투쟁’은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유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강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을 때도 요셉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의 조상 중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은가?”라고 되물었다. 만약 이름을 ‘다윗(영어명 데이비드)’이라고 지었다면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을 터이다. 다윗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었다. 다윗 문중의 후손들은 주로 베들레헴 지역에 모여서 살고 있었다. 예수의 출산을 위해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을 찾은 것도 그랬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베들레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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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드 반 혼토르스트의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왕’.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믿었다.

마태복음의 첫 구절은 이를 강하게 의식한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마태복음 1장1절) 마태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복음서의 첫 장, 첫 구절에서부터 못을 박았다. 당시 유대인의 상식을 겨냥해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자 메시아’임을 강조한 셈이다.

그러니 예수 당시에는 어땠을까. ‘신의 아들’이라는 그에게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기대했을 터이다. 예수가 그런 지도자, 그런 선봉장, 그런 혁명가가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어떤 이는 예수를 ‘인간 해방을 위한 혁명가’로 보고, 또 어떤 이는 예수를 ‘인간 영혼에 대한 구원자’로 본다. 어느쪽 눈에 무게를 싣느냐에 따라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로 나뉜다.

지난주 시리즈 6회가 나간 후에도 독자들의 요청이 많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산상수훈’을 비교하자는 메시지였다. 다시 말해 ‘좌파의 예수’와 ‘우파의 예수’를 짚고 가자는 말이다. 나는 팔복교회에서 눈을 감았다.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 그가 이곳에서 ‘산상수훈’을 설할 때는 후대에 이런 논란이 있으리라 예상을 했을까. ‘예수의 눈’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쪼개지리라 생각이라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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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헬(1525~69)의 1598년작 ‘산상설교’. 모여든 군중 가운데 예수가 있다. ‘산상수훈’을 사람과 우거진 숲과 새와 하늘이 듣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산상수훈’은 다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복음)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누가복음)은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가난한 사람들’을 겨냥한다. 누가복음에는 또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서 ‘불행한 사람들’도 지적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이들은 결핍이 없다. 그래서 ‘눈’을 자기 안으로 돌리지 않는다. 예수는 그걸 지적했다. 차이는 또 있다. 마태복음은 산에서,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설해졌다. 그래서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라 불린다. 이에 대한 해석을 놓고 그리스도교 내부는 좌파와 우파로 갈린다.

좌파 진영은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강조했다. 그건 물질적 가난을 의미한다. 사회적 빈자와 약자를 위한 거다. 예수님은 ‘인간 해방’을 위해 싸운 분이다.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게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거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자들도 그렇게 본다. 우파인 복음주의 진영은 다르다. “예수님은 ‘영적인 가난’을 말했다. 사회적 문제와 큰 상관이 없다. 오직 영적인 가난을 추구하는 게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좌파는 ‘사회구원’에, 우파는 ‘개인구원’에 방점을 찍는다. 둘은 그렇게 갈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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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에서 내려다 본 갈릴리 호수. 배가 그리는 물결이 참 아름답다.

정작 예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메시지는 정말 이토록 다른 걸까. 진보 진영에서 평생을 바치고 있는 목사님에게 터놓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일을 하다보면 지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다보면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나요?” 반박할 줄 알았다. 부인할 줄 알았다. 뜻밖이었다. 그는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솔직히 그렇다. 일을 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돌아서면 지친다. 갈수록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그건 사실이다.” 왜 그럴까. 내면의 샘터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느라 눈이 바깥을 쫓아가는 사이에 영성의 샘터에서 해야 할 펌프질을 잊어버린 탓이다.

그럼 우파인 복음주의 진영은 어떨까. 그들은 주로 영적인 문제를 강조한다. 사회적 발언에는 무관심하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그렇게 영적으로 가난하고, 가난해진 다음에는 어쩔 건가.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다음에는 어쩔 건가. 그렇게 안으로 들숨만 들이마신 다음에는 어쩔 건가. 거기서 멈추면 죽고 만다. 그 ‘무한한 고요’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살려면 다시 숨을 내쉬어야 한다. ‘파~아!’하고 내뱉어야 한다. 그게 날숨이다. 그래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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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의 천장. 팔각으로 된 벽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예수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이마신 다음에는 바깥으로 내쉬어야 한다. 일상을 향해, 현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내쉬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다시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는 거다. 가난한 마음을 찾는 게 ‘들숨’이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게 ‘날숨’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이자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그걸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에고의 눈’이 ‘예수의 눈’을 점점 닮아간다.

그러니 둘이 아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메시지는 둘이 아니다. 그걸 둘로 해석하는 건 쪼개고, 나누고, 편가르기에 익숙한 ‘나의 눈’ 때문이다. 인간의 눈, 에고의 눈 말이다. ‘예수의 눈’에서는 그렇게 쪼개질 수가 없다. 들숨과 날숨은 둘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숨’이다. 개인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도 마찬가지다.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보와 보수를 고집하는 이들은 스스로 ‘반쪽’임을 자처한다. 예수는 ‘반쪽’이 아니라 ‘온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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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1650년작 ‘그리스도의 초상’. 예수의 눈이 맑디 맑다. 연민은 읽히지만 집착은 읽히지 않는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요한계시록 22장13절)

무슨 뜻일까. 그건 ‘부분’이 아니라 ‘전체’라는 뜻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면서 동시에 오른쪽’이다.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다. 좌파와 우파를 모두 품는다는 뜻이다. 그게 뭘까. ‘거대한 중도(中道)’다. 그게 예수의 정체성이다.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예수의 칼집에는 좌파의 칼도 있고, 우파의 칼도 있다.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칼을 꺼낼 뿐이다. 그게 ‘예수의 지혜’다. 그게 전능(全能)이다. 어느 한쪽의 칼만 쓰는 건 전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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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제단 옆에는 콩나물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는 오래된 라틴어 악보가 놓여 있다.

팔복 교회 안은 고요했다. 제단의 십자가 앞에는 오래된 악보가 하나 펼쳐져 있었다. 중세 때 사용했다는 악보다. 음표가 독특했다. 콩나물 머리는 있는데, 콩나물 꼬리는 없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음을 단 악보다. 팔복(Beatitudes)이 하나씩 시작할 때마다 라틴어로 대문자‘B’를 달아 놓았다. 그랬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노래였다. 우리의 고집을 허물고, 잘남을 허물고, 착각을 허물면서 잦아드는 음표들. 그 음표 안에 깃든 온유한 폭풍. 그게 ‘산상수훈’이다. 여덟 개의 ‘B’로 가득한 악보가 여덟 개의 ‘B’로 가득한 삶을 노래한다.

교회 안 빈 자리에 앉았다. 예닐곱 명의 순례객들이 띄엄띄엄 앉아 묵상을 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성서를 꺼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5장4절)

산상수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 마음’을 노래한다. 하느님 나라를 가득 채우는 신의 속성을 노래한다. 그 속성이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그래서 예수는 그 속에 깃드는 방법을 일러준다. 여덟 가지의 길이다. 인간은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 아무리 백만장자라 해도, 제 아무리 절대권력자라 해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다. 막상 마주하면 감당하기 벅찬 일, 그것이 ‘애(哀)’라는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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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안에서 순례객들이 앉아서 묵상을 하고 있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슬퍼하는 사람들, 애(哀)를 품은 사람들. 그들이 행복할 거라 말한다. 왜 그럴까. 슬픔은 늘 ‘상실’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 무언가를 놓쳤을 때, 누군가와 이별할 때 슬픔이 밀려온다. 슬픔의 바닥에는 상실의 강이 흐른다. 예수는 그런 ‘상실감’을 소중히 여겼다. 왜 그랬을까.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 우리의 무릎이 꺾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릎이 꺾일 때 우리 안에 구멍이 뚫린다. 슬픔의 구멍, 상실의 구멍이다.

위로는 어디를 통해서 올까. 그 구멍을 통해서 온다. 신의 속성은 인간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평형수’다. 내가 무릎을 꿇을 때, 나의 고집이 무릎을 꿇을 때, 나의 에고가 무릎을 꿇을 때 뚫리는 구멍을 타고 ‘평형수’가 밀려온다. 그게 위로다. ‘하느님 나라’에서 밀려오는 근원적인 위로다. 자신의 무릎을 꺾은 이에게는 위로가 있다. 에고를 빳빳이 세운 채 스스로 무릎을 꺾지 않은 이에게는 위로가 없다. 그의 내면에 슬픔의 구멍, 상실의 구멍이 뚫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팔복교회 내부 모습을 담은 동영상. 천장 아래 팔각 벽면에 라틴어로 ‘산상수훈’이 적혀 있다.



팔복교회 안으로 순례객들이 들어왔다. 스페인에서 온 그룹이었다. 20명쯤 됐다. 그들은 좁은 교회 안에 빙 둘러섰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교회 천장을 타고서 소리가 울렸다. 가사를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 음표들 속에서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묵상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5절)

온유하지 않은 이들은 누구일까. 고집이 센 사람들이다. 이번에 예수는 ‘고집’을 겨냥한다. 고집이 뭘까. 내가 세운 ‘잣대의 성벽’이다. 사람들은 내 땅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는다. 그 성벽이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아군에게는 성문을 열고, 적군에게는 성문을 닫는다. 그래야 내 땅이 지켜지니까. ‘예수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 그건 성벽이 아니라 ‘감옥’이다. 신의 속성은 이 우주에 가득하다. 그걸 외면한 채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이처럼 역설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8년간 멀리 수행의 길을 떠났던 젊은 수행자가 돌아왔다. 중국의 장경(章敬) 선사가 물었다.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했는가?” 젊은 수행자는 대답 대신 꼬챙이를 하나 집었다. 땅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장경 선사가 말했다. “그래 그뿐인가. 다른 것은 또 없는가.” 그 말을 듣고 수행자는 발로 동그라미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합장한 뒤 돌아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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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의 1915년작 ‘구성10-부두와 해안’. 동그라미 안에 그어진 선들이 ‘수많은 십자가’가 아닐까. 그 위에 우리를 눕힐 때 비로소 ‘동그라미’가 드러난다. 예수가 설한 ‘하느님 나라’가 드러난다.

이 선문답 일화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겼을까. 장경 선사가 물었다. “그동안 수행을 해서 무엇을 깨쳤는가.” 젊은 수행자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깨달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 딱히 건넬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제자의 공부가 미심 쩍은 장경 선사가 되물었다. “그것 뿐인가.” 더 정확한 걸 보여달라는 말이다. 이에 젊은 수행자는 동그라미를 지워버렸다. 왜 그랬을까. 바로 그 순간 ‘진짜 동그라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꽃 피고, 새 울고, 비 내리는 이 세상이다. 이 우주다. 젊은 수행자는 ‘자신의 동그라미’를 지우면서 이 우주를 다 품는 ‘테두리 없는 동그라미’를 드러냈다. 나의 땅, 나의 고집, 나의 성벽을 허물 때 비로소 예수의 땅이 드러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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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앞에는 ‘산상수훈’을 영어로 새긴 팻말이 놓여 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마태복음 5장)

예수가 말한 ‘의로움’이란 대체 뭘까. 언뜻 생각하면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선교를 하다가 목숨을 잃은 초대교회의 사도들, 지금도 오지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들. 그들이 바로 ‘의로움에 주린 이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예수가 말한 ‘의로움’은 다소 달랐다. 꼭 목숨을 걸어야 하는 크고 위태로운 행위를 가리킨 건 아니었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떤 기준에 부합되다’는 뜻이다. 그게 뭘까. 예수는 무엇에 부합될 때 의롭다고 했을까. 또 무엇에 목마를 때 의롭다고 했을까. 물음이 올라왔다. 내 안에서 자연스레 싹이 트는 물음. 그걸 따라가면 된다. 그게 숨 쉬는 묵상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부합될 때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까?’ 답은 하나였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관통하며 예수가 노래하는 딱 하나. 다름 아닌 ‘하느님 마음(신의 속성)’이다. 그것과 부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흡족해진다. 다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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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주위의 풍경. 예수는 이렇게 생긴 곳에서 산상수훈을 설했다.

그러니 누가 의로운 사람일까. 하느님의 마음, 신의 속성을 갈구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이다. 거기에 부합되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을 향해 “의로운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러니 거창하게 목숨을 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 안의 고집을 하나 꺾을 때, 내 안의 집착을 하나 내려놓을 때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마음에 주리고, 신의 속성에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함’을 얻을 것이다.”

<8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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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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