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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올해도 ‘주총 담합’…826개 상장사 중 44%가 25일에 몰아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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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super)란 단어는 수퍼맨·수퍼스타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퍼 주총 데이’는 다르다. ‘대단한·특별한’이란 뜻의 수퍼, ‘주주총회’의 줄임말인 주총, 그리고 ‘날’이란 뜻의 영어 ‘데이’를 합쳤다.

연말 결산일로부터 90일 이내에 정기 주총을 열어야 하는 상장사들이 시간에 쫓겨 주총을 3월 특정일에 몰아 여는 것을 두고 이런 신조어를 만들었다.

 올해도 수퍼 주총 데이가 재현된다. 1일 금융정보업체 와이즈에프엔에 따르면 3월 주총 일정을 공시한 상장사 826개 중 78%(644개)가 금요일에 주총을 연다.

특히 25일 금요일엔 44%(367개) 기업의 주총이 몰렸다. 한화·한화케미칼·한화테크윈 등 한화 계열사를 비롯해 KB금융·LS·대림산업·엔씨소프트·코오롱·남양유업 같은 회사가 그날 주총을 연다.

 18일(금)에는 SK텔레콤 등 SK 계열사와 LG전자 등 LG 계열사, 대한항공 등 한진 계열사, 현대중공업 계열사가 주총을 개최한다. 삼성전자 등 삼성 계열사와 현대차 등 현대차 계열사의 주총은 11일(금)에 몰렸다.

 이처럼 많은 상장사가 같은 날 주총을 열다보니 몸이 하나인 소액주주가 여러 주총에 참가할 수 없다. SK·LG 계열사 주식을 가진 박주현(34)씨는 “경영진과 소액주주가 직접 만나는 자리가 흔치 않은데 올해도 주총에 참가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회사가 일부러 주주와 만남을 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이 조금만 신경쓰면 조정할 수 있는 주총 날짜를 일거에 몰아놓은 건 귀찮은 일을 한 번에 몰아서 처리하자는 ‘편의주의’가 작용한 탓이다. 한 대기업 기업설명(IR) 담당자는 “기업 입장에선 의사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주주가 부담스럽다. 소액주주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주총을 한 날로 몰았다”고 털어놨다.

 기업이 주총을 주주와 소통하는 자리가 아니라 부담스러운 ‘요식행위’로 여기다보니 그마저도 날림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사 주총 평균 소요시간은 33분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 대기업 주총에 참가했던 강모(33)씨의 얘기다.

 “의장이 논의 주제를 꺼내자마자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앞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의장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선창했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추인하더라고요. 주총 때마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이끄는 미국 버크셔 해서웨이는 보통 5월에 주총을 연다.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란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주총엔 주주 2만~3만명이 참석한다. 버핏과 경영진은 5~6시간 동안 쏟아지는 주주들의 심도 깊은, 때론 시시콜콜한 질문에 답하며 주총을 ‘소통의 축제’로 만든다.

 주주로서 한 표를 행사하는 건 주주의 권한이자 책무다. 기업이 주총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주주를 배려한다”고 한다면 이율배반이다. 기업 스스로 안 한다면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미국·영국·독일·호주 등 선진국은 대부분 회계연도 말일로부터 4~5개월 뒤 주총을 연다. 대만은 하루 열 수 있는 주총을 200개로 제한한다.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엔 전자투표제를 의무 시행하도록 했다. 정체 불명의 ‘수퍼 주총 데이’란 단어가 사라질 날을 기대해 본다.

김기환 경제부문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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