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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구할 수 있겠나" 질문 20분 만에 은색 권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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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구할 수 있겠나?

사업가 K(50)씨는 한 번 슥 쳐다보더니 군말 않고 사라졌다. 20분쯤 지났을까. 돌아온 K씨는 신문지에 감싼 묵직한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곤 신문에 감싼 쇠고기를 풀어헤치듯 종이를 벗겨냈다. 그 속에 있는 건 은색 권총. 사람 많은 오후, 번화가의 카페였지만 K씨의 행동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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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인 사업가에게 "쉽게 총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가 전화 한통을 걸자 채 20분도 안돼 젊은 필리핀 남성이 신문지에 감싼 은색 권총을 갖고 왔다. 남성은 번화가에 있는 카페였음에도 거리낌없이 신문지를 펴 총을 보여줬다. 마닐라=오종택 기자

기자는 필리핀 현지에서 그렇게 두 눈으로 권총을 확인했다. 1만5000페소, 한화로 38만원 가량을 쥐여주면 38구경 수제권총을 구할 수 있다는 게 현지인의 설명이다. 어떤 등록증이나 어떤 기록도 필요 없다고 한다. 실제 필리핀엔 100만정 이상의 불법 총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5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으며 미국의 총기사용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다.

최근 3년 필리핀서 피살 한인 34명 전체 분석
대부분 현지화된 한인들, 3분의 1은 청부살인

쉽게 구할 수 있는 총만큼이나 필리핀의 치안을 허술하다. 한인도 예외가 아니다. 2013년 이후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4명(30건)이다. 매년 10명 이상이 사망하는 셈이다. 그중 60% 이상은 총기에 의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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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20년 동안 사업을 해온 김모(50)씨는 “‘K팝’ 대신 ‘K크라임(crimeㆍ범죄)’이란 말을 써야 할 정도”라고 했다. 중앙일보는 경찰청과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 현지에서 숨진 34명의 기록 전체를 입수해 분석해봤다.

◇ 60% 이상이 총기 사건… 불안한 치안

누가 미스터 박이냐(Who is Mr.Park?)

지난해 9월 17일 낮, 필리핀 앙헬레스 시내의 한 건물.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성 다섯발이 울렸다. 총을 맞은 한국인 박모(당시 61세)씨는 이날 사망했다. 주변에 여러 한인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청부살인이래서다.

필리핀 내 살인사건 수(2014년 : 9945건)는 하루 평균 27건 꼴로 한국(2014년 : 938건)보다 10배 이상 많다. 현지 사업가 K씨는 “뒷골목에 있는 애들에게 돈 몇 푼 쥐여주면 될 정도로 청부살인이 어렵지 않다”면서 “전문 건맨(Gunmanㆍ살인청부업자)과 백업 요원, 미행조 등 최소 5명을 고용하고 대상자를 며칠간 미행하며 정보를 모으는데 드는 비용은 2500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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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일어나는 한인 살인사건의 60% 이상은 총기를 이용해 일어난다. 오종택 기자

◇평균 체류기간 7.3년… 피해자 대부분은 ‘로컬 코리아노(Local Koreano)‘

피해자들의 필리핀 평균 체류기간은 7.3년. 일시 체류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피해자 대다수가 ‘로컬 코리아노(Local Koreanoㆍ필리핀에 정착해 현지인처럼 사는 한국인을 뜻하는 타갈로그어)’였던 셈이다.

평균 나이는 48.7세. 22명(64.7%)이 자영업자였다. 지난해 12월 20일 필리핀 바탕가스에서 총에 맞아 숨진 조모(56)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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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20여 년 전 필리핀으로 건너가 정착한 필리핀 한인 1세대로 현지에서 건축ㆍ임대업을 하던 자영업자였다. 그는 필리핀 여성과 결혼했다가 혼인무효소송을 진행 중이었고, 사망 당시 다른 필리핀 여성과 동거하며 아이도 키우고 있었다. 전형적인 ‘로컬 코리아노’다.

특히 사업상 다툼이나 금전 갈등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발생한 4건의 청부살인도 사업ㆍ재산 문제로 주변과 갈등을 빚던 상황에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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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건맨(Gunmanㆍ살인 청부업자)을 고용해 저지르는 청부살인은 전체 30건 중 10건이나 됐다. 중부 루손 한인회 권영각 감사는 “치안이 안 좋고 총기도 많은 나라라 한국에선 사소한 다툼으로 끝날 수 있는 갈등도 살인과 같은 큰 비극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청부살인 배후 검거 단 1건… 미약한 수사력

살인사건, 그 중에서도 청부살인이 빈발하는데도 경찰 수는 14만 명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수사지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필리핀 앙헬레스 현지의 코리안데스크 이지훈 경감은 “범죄가 발생해도 경찰이 자기 돈으로 기름값을 내가며 수사해야 할 정도라 현지 경찰이 의지를 갖고 수사하길 기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3년간 발생한 청부살인 중 배후자까지 밝혀진 건 2014년 카비테주에서 벌어진 한 건이 전부다.

당시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던 한국인 2명이 필리핀인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한 명은 총에 맞아 숨졌지만, 다른 한 명이 사망한 척하며 위기를 넘긴 뒤 경찰과 함께 자신을 피습한 건맨의 뒤를 쫓아 이들을 고용한 배후까지 검거했다. 배후는 함께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던 한국인 신모(41)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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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앙헬레스시에서는 한인 자율파출소와 현지 경찰서가 협력해 한인타운 인근을 순찰하며 범죄를 방지활동을 펼친다. 지난달 2일 이창호 중부루손한인회 수석부회장과 현지 경찰관이 순찰을 도는 모습. 오종택 기자

“묻지마 이민 자제하고 안전지역에 살아야…”

필리핀 이민에 대한 한국인의 ‘심리적 진입장벽’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준비가 부실하다 보니 투자사기나 각종 분쟁에 휘말리기 쉽다. 동업자나 현지인과의 사이에 쌓인 갈등이 원한관계로 번지면서 강력범죄 피해자가 잇따라 나오는 구조인 셈이다. 중부루손 한인회 사무실로 이창호 부회장은 “필리핀 이민이 만만하다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지에 정착 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책은 방범 시설이 완비된 안전지역에 집을 얻는 것이다. 대표적 안전지역으로 꼽히는 앙헬레스 클락경제특구는 2m 높이의 담장을 경계로 클락개발공사(CDC)에서 고용한 특별경찰 60여명이 24시간 치안을 관리한다. 무등록 차량의 출입도 통제된다.

 박민제·채승기 기자, 필리핀=윤정민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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