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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연예]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룸' 브리 라슨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말부터 전 세계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은 거의 이 배우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소녀의 충격적인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룸’(원제 Room, 3월 3일 개봉,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에서 좁은 창고 방에 7년간 감금당한 채로 납치범의 아이까지 낳아 키운 강인한 소녀 조이를 연기한 브리 라슨(26).

우리에겐 낯설지만 미국에선 인디 영화계의 출중한 실력파로 알려져 있다. 연기 경력은 자그마치 20년차. 그가 ‘룸’으로 거머쥔 마흔 개 가까운 트로피는 그러니까, 오랜 무명 세월 갈고 닦은 내공이 거둔 결실인 셈이다. 케이트 블란쳇·제니퍼 로렌스 같은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그가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건 다분히 예견된 결과였다.

“평범함 속의 훌륭함(Brilliant Everyman Quality)”.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브리 라슨을 캐스팅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다. “극적인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많다. 그러나 아주 평범해 보이는 소녀가 사랑스럽고 진실한 내면 연기만으로 장면 전체를 압도해야 한다면 그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열정적인 청소년 상담사를 연기한 인디 영화 ‘숏텀 12’(2013, 데스틴 크린튼 감독)에서 발견한 브리는 바로 그런 자질을 갖고 있었다.” ‘룸’의 원작은 조이의 다섯 살 박이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의 1인칭 관점으로 묘사된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 “원작 소설에서 명확한 캐릭터 대신 잭의 시선에 비친 느낌이나 색깔로 다가왔던” 조이 역에 피와 살을 부여한 건 전적으로 브리 라슨의 몫이었다.

감옥 같은 방에서 잭이 그림 속 강아지에게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며 언젠가 살아있는 강아지를 키울 거란 꿈을 버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꼬마로 자랄 수 있었던 건 조이의 헌신적인 사랑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브리 라슨은 놀랍게도 한 발짝 더 나아가 이 명제를 엄마 조이에게도 대입하게 만든다.

조이가 어리지만 강한 모성애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 역시 한때 잭만큼 사랑받는 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그걸 조이가 잭과 함께 보내는 사소한 일상에 꼼꼼히 담아 상기시킨다. 열일곱 살에 납치되기 전의 조이를 상상하게 만드는 브리 라슨의 풍부한 연기는 영화가 좁은 방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결코 판타지가 아니며,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임을 잊지 않게 해준다.

아역 배우 제이콥을 촬영 내내 엄마처럼 챙기며 감정 연기와 손동작 하나까지 돌봤다는 브리 라슨.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감금당한 상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그는 혹독한 훈련으로 지방을 12%까지 감량했다.

장시간 갇혀 있으면 어떤 느낌일지 이해하기 위해 정신의학 박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 달간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집에 틀어박히기도 했다. 모처럼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불현듯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고 그는 말한다. 그건 ‘룸’뿐 아니라, 거친 이민자 가족의 막내딸로 분한 ‘돈 존’(2013, 조셉 고든 레빗 감독), 가족이 파탄 난 트라우마로 바람둥이가 된 언니(에이미 슈머)와 달리 유년기를 극복하고 가정적으로 성장한 동생을 연기한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2015, 주드 아패토우 감독) 등 그가 “영화에서 복잡한 인생이 녹아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게 해준 슬픔과 상실”에 관한 어떤 ‘핵체험’이기도 했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LA로 이사를 왔다. ‘룸’ 속 창고 방보다 약간 넓은 원룸 아파트에서 엄마와 나, 동생 이렇게 셋이 살았다. 햄버거를 사먹을 형편도 안 될 만큼 가난했지만, 엄마와 설탕 통을 이용한 게임을 하면서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붙박이 침대에 셋이 웅크려 자다 깨면 엄마가 입을 막고 흐느끼는 걸 보곤 했다. 그게 아빠가 이혼하자고 했기 때문이고, 엄마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이후로도 몇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 시절은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런(상실의 슬픔이 녹아난) 영화들에 끌린 것이다.”

일곱 살에 TV 드라마 단역으로 시작해 이젠 주연급 배우로 우뚝 선 브리 라슨. 2005년 미니 앨범 ‘She Said’를 발표하며 가수로도 데뷔한 그는 연기 외에도 매일 일기를 쓰고 노래가사를 쓰며 뭔가를 새롭게 창작하는 일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있다.

가족 영화(‘룸’)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킬리언 머피와 호흡을 맞춘 범죄 액션 ‘프리 파이어’(벤 웨틀리 감독), 뮤지컬 멜로 영화 ‘바스마티 블루스’(댄 바론 감독) 등 차기작 행보도 다채롭다. 현재 촬영 중인 작품은 톰 히들스턴과 주연하는 킹콩 리부트 영화 ‘콩: 스컬 아일랜드’(조던 복트-로버츠 감독). 무명을 벗어나는 데 걸린 세월을 “길었지만 꼭 투자해야 했던 시간들”이라 말하는 이 긍정 마인드의 배우는 영화 ‘룸’이 선사한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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