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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칼리 여신의 땅 콜카타 영국의 인도 지배 ‘베이스 캠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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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14면

1 인도 콜카타 후글리강 강변공원의 젊은 연인들. 콜카타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1690년 후글리강 어귀에 작은 교역소를 세우면서 벵골만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2 칼리 여신을 모시는 힌두교 칼리가트 사원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콜카타 시민들. 3·4 힌두교 사원과 칼리 여신. [사진 주강현·한경환 기자]

탐사대는 미얀마 양곤에서 태국 방콕을 경유, ‘벵골만의 꽃’인 인도 콜카타로 갔다. 직항편이 있다면 비행 거리가 한 시간여밖에 되지 않는 콜카타와 양곤 그리고 방글라데시 다카는 각각 다른 종교를 사실상 ‘국교’로 믿는 국민국가 시스템에 결박되어 있다. 인도의 힌두교와 미얀마의 불교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이슬람은 벵골만 트라이앵글을 규정짓는 경계이고 철학이며 존재근거이기도 하다.


콜카타 시내 힌두교 칼리사원을 찾았다. 검은 살빛의 무서운 칼리 여신이 지배하는 사원에 참배하기 위해 언제나 줄을 선다. 탐사팀이 방문했던 지난달 26일은 헌법 제정일로 공휴일인 ‘공화국의 날’이어서 더욱 붐볐다. 칼리 여신이 좋아하는 붉은빛을 워낙 많이 뿌려서인지 길바닥조차 뻘겋게 타들었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대에 캘커타(Calcutta)라 불리다가 2001년에 들어와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적으로 바뀐 도시. 도시 명칭에도 칼리 여신이 숨겨져 있다.


도시 인구의 80%가 칼리를 숭상하는 콜카타의 힌두(힌두교도) 틈새에서 무슬림(이슬람교도)과 기독교인, 자이나교도와 불교도, 시크교도는 소수자다. 그리하여 콜카타는 ‘칼리 여신의 항구’로 불러도 될 것이다.


넓디 넓은 인도 대륙에 수많은 도시가 산재하지만 콜카타는 어쩌면 인도의 운명을 바꾼 도시 중 하나가 아닐까. 영국이 인도와 만나면서 벵골의 운명이 바뀌었고, 콜카타는 어느덧 벵골의 중심이 되었다. 콜카타는 당연히 인도에 속한다. 그러나 콜카타 사람들은 ‘인도보다 벵골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남인도가 확고부동의 타밀나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콜카타는 인도 이전에 벵골이었다. 칼리도 원래 벵골에서 숭상하던 여신이다.


콜카타 또한 미얀마 양곤처럼 강항(江港)이다. 벵골만 어귀로부터 154㎞ 정도 상류 지점, 갠지스강 지류인 후글리강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1690년 이 강의 어귀에 교역소를 세우면서 콜카타는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콜카타는 1772~1911년 사이 무려 150년 가까이 인도의 수도였다.


후굴리 강변공원은 부둥켜안고 있는 젊은 연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우리가 역사의 페이지를 들추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후굴리는 이렇듯 영원한 안식을 주는 강이다. 그러나 후굴리강 역시 벵골만을 거슬러온 제국 함대의 포성으로 자욱했던 ‘슬픔의 강’‘저항의 강’이었다.


탐사대는 여느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콜카타 1번지’ 빅토리아 기념관도 들렀다. 입구의 조각상 부조에 인도 병사와 신민을 이끈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코끼리를 타고 도도하게 앉아 있다. 콜카타가 ‘제국의 수도’였음을 보란 듯이 과시하는 전형적 상징. 기념관은 웅장한 대리석 원주의 무굴 건축과 서구 건축이 융합된 양식이다. 식민 항구의 특징은 예외 없이 ‘튀는’ 건축물이다. 무역상인과 돈이 모여들다 보니 자본력에 기반한 건축물이 들어서기도 하겠지만, ‘콜로니얼 양식’은 기본적으로 ‘겁주기’ 혹은 ‘위세 과시하기’다.


콜카타의 많은 건축군은 식민모국의 ‘짝퉁’ 아니면 ‘짬뽕’이다. 가령 최고법원 건물은 벨기에 양식, 성바울 교회는 인도-고딕 양식이다. 그런데 벵골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벵골 문예운동은 콜카타를 현대 인도문학과 예술사상, 인쇄와 출판, 레크리에이션 등의 본산으로 만들어냈다. 서점이나 공공건물 곳곳에서 마주치는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단순하게 시인만이 아니었다. 이 ‘순전한’ 벵골 사람인 타고르는 1937년 벵골 전통음악과 춤을 현대적으로 결합시킨 콘퍼런스를 창조해냈고 그 전통은 지금껏 이어온다. 그리하여 벵골만의 독특한 문화가 창조된 것이다. 그 덕분에 벵골만에서는 벵골어·영어·힌디어·우르두어 등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처지에서는 똑같은 소리지만 콜카타항이나 수산시장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이들 ‘언어 다양성의 합창’이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기리는 기념관에 있는 청동 조각상 부조. [사진 주강현]

영국 동인도회사가 250년이나 경영해양 실크로드 문명사에서 볼 때도 항구도시 콜카타의 탄생은 세계사를 바꾼 큰 사건이다. 1601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제1차 동방 항해 때 아시아에 보낼 선박 역량은 고작 5척 수준이었다. 이 회사가 120년 만에 세계 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200년 후에는 광대한 대륙을 차지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동인도회사는 1857년에 일어난 일명 세포이 항쟁으로 인도 통치권을 잃고 해체에 내몰렸지만 장수 기간이 무려 250여 년이나 된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세계 경영의 3대 성공사례로 영국의 인도 통치를 손꼽았다.


인도사가 하마우즈 데쓰오는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를 물으면서 제국의 힘이 무조건적 강압만이 아닌 정교한 전문적 통치술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식민지를 겪은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시각임에 틀림없다. 감옥에 가둔 인도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한 혹독한 고문도 통치기술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250여 년 장수 회사의 비결은 세계 경영사에서 주목을 요한다. 제국을 경영해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세계 경영을 해본 나라들의 전후를 살펴봄은 감고계훈(鑑古戒訓·옛날을 통해 큰 교훈을 배운다는 뜻) 그 이상이다.


탐사대는 또 마블 팰리스(대리석 궁전)를 찾아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 기둥과 바닥, 거대 건축물 곳곳을 채운 세계 해양경영의 전리품을 목격했다. 나폴레옹상과 웰링턴 장군상, 루벤스의 원화, 당구대와 댄싱룸 등은 제국 영국의 자기과시랄까, 부르주아 물질문명의 숭배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너무 차고 넘치게 물건을 늘어놓아 속물주의적 천박함도 느껴진다. 식민지에서 제국의 강박증에 식민관료 자신들이 포로가 된 탓일까.


영국과 네덜란드가 아시아 무대로 나아가려 했을 때 이미 해양선발대 포르투갈은 곳곳에 요새를 만들고 함포로 홍해·아라비아해 등 인도양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이 인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의 수라트였다. 수라트는 당대 세계 선박이 모여들던 국제 항구. 영국의 아시아 침략은 포르투갈뿐 아니라 신진 세력 네덜란드의 심각한 견제를 받았다. 향료의 보고인 인도네시아 몰루카 암본에서 영국 상인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학살당한 사건(1623년)이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본격 진출이 좌절된 대신, 영국은 인도양을 착실하게 챙겼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영국이 격멸시키며 세계사는 뒤바뀐다. 다른 지역과 달리 벵골은 남인도에 비해 이슬람 왕조인 무굴제국(1526~1857)의 지배력이 강했다. 결정적 전환은 1757년 6월 23일 콜카타 북방 약 130㎞ 지점의 플라시에서 벌어졌다. 플라시 전투의 승리로 영국은 벵골을 완벽히 장악한다. 동인도회사는 벵골·비하르·오리사의 징세권을 장악해 영토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회사는 상사이면서 동시에 제후가 되어 전쟁으로 영토를 확대, 마침내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영국의 콜카타를 통한 벵골만 지배는 해양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아라비아해는 전통적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주무대였다. 인도 남서부 캘리컷 등 말라바르 해안에는 끊임없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이닥쳤다. 남동부 코로만델 해안은 상대적으로 무역거래에서 저평가되던 지역이다. 더군다나 북방 벵골만은 ‘무주공산’까지는 아니어도 아라비아 상인 같은 확고부동의 해상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동남아와 중국의 바닷길이 미치지만 강력하지 못했던 공백지대. 방대한 영토를 가진 무굴제국은 그로 인한 막대한 수입이 확보되었지만 해양 인식은 저급했다. 영국의 벵골만 장악은 이 모든 공백을 가로채는 독점세력의 출현을 뜻했다. 이로써 영국은 벵골만 콜카타를 기반으로 동쪽으로 나아갈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셈이다.


벵골의 콜카타는 미얀마의 양곤, 말레이시아의 페낭, 믈라카 그리고 싱가포르, 홍콩으로 이어지는 제국의 해양 벨트가 완성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서쪽에서 동쪽을 들이치는 거대한 원동력이 1772~1912년 옛 영국령 인도의 수도 콜카타에서 나온 것이다. 벵골만은 고대로부터 ‘미얀마-윈난(雲南)성-쓰촨(四川)성’으로 이어지는 육상 루트와도 연결되었다. 콜카타 북방 490㎞에 영국인이 피서지로 만든 청량한 휴양도시 다르질링(Darjeeling)이 나타난다. 다르질링은 히말라야 산줄기에 놓여 있고 에베레스트도 눈에 들어온다. 북방으로 네팔·부탄·티베트가 버티고 있다. 콜카타는 이들 북방 내륙에서 바다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히말라야 산줄기의 불교가 바다로 내려온 것도 벵골만을 통해서였다. 콜카타에서 가장 오래된 아름다운 서양 건물인 국립박물관에 명품 불상이 다수 눈에 들어오는 것도 이러한 문화 전통 덕분이겠다.


슬럼가 수백 개는 언제쯤 사라질까벵골만은 기본적으로 습윤하다. 수년 전 서울대와 국제백신연구소(IVI) 연구팀은 콜레라균이 인도 벵골만에서 유래했음을 밝혀냈다. 모기도 들끓는다. 사람들이 살기 부적당하다는 것은 다른 생물체들엔 ‘천국’이라는 뜻이다. 인도 서부 벵골에서 방글라데시에 이르는 광활한 맹그로브 습지는 이 습윤한 대지와 바다의 원초적 생명력과 강인한 자연성을 그대로 말해준다. 오죽하면 벵골호랑이가 아직까지 야생의 삶을 이어갈까.


콜카타는 무역에 유리한 곳이지만 덥고 습한 강기슭 저습지이기에 거주지로는 적당하지 않다. 늪지와 소택지가 곳곳에 산재한다. 식민지법에 따라 콜카타 중심부는 백인이 차지했고 원주민은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식민 항구의 나쁜 흔적은 오늘의 주거환경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콜카타에는 수백 개의 바스티스(슬럼가)가 산재한다. 1억4000명으로 인도에서 셋째로 인구가 많은 이곳에서, 그중 3분의 1이 살고 있는 이들 슬럼가를 청산할 조짐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콜카타에서 생을 마쳤다. 어쩌면 자신의 대륙 유럽이 아시아에 남긴 죄업을 백인 수녀가 푼 것일 수도 있다.


1706년 콜카타 인구는 1만 명에 불과했다. 1752년 거의 12만 명, 1821년까지 18만 명에 도달한다. 중심가에 백인 타운이 건설되고 바깥에는 신흥부자촌이 들어선다. 1854년 철도가 놓이기 시작하고 콜카타항에서 파키스탄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건설되자 영국의 상인과 은행가, 보험업자, 인도 상인 등이 몰려든다. 어느 항구나 변곡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콜카타에 지난 20세기의 시작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1912년 브리티시 인디아가 콜카타에서 델리로 옮겨간다. 1946년 힌두와 이슬람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다. 수백만 명의 난민이 동부 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에서 콜카타로 쏟아져 들어오고 그만한 숫자가 방글라데시로 나갔다.


콜카타를 떠나기 전, 시내 옥스퍼드 서점에 들렀다. 규모는 중소 서점에 불과하나 정연한 서가 배치와 양질의 책이 맘에 들었다. 책 구입을 도와주던 ‘노인 직원’이 자그마치 60여 년을 이 서점에서 일하고 있단다. 청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작은 서점 지킴이로 일해 왔다. 책을 권하는 수준이 전문 사서다. 콜카타의 힘, 문화의 힘이 받쳐주는 항구도시이기에 가능하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해양 실크로드 문명의 범주에는 당대 문화의 힘도 당연히 포함되리라는 것을.


이제 탐사대는 방글라데시로 떠날 순간이다. 이로써 ‘미얀마-콜카타-방글라데시’로 연결되는 벵골만 황금 트라이앵글이 완성된다. 보통의 한국인에게 벵골만은 일상의 사고 바깥에 존재한다. 해양 문명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 일상의 영역으로 이름도 모를 바다들을 끌어들이려는 지난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가 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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