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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구절판, 적송 위 감자칩…셰프 감각 보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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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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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은 음식의 옷이다”라고 어느 요리사는 말했다. 딱 떨어지는 그릇에 형형색색으로 놓인 음식은 잘 차려입은 미인처럼 매혹적이다. 게다가 요즘 파인다이닝(fine dining·고급 코스 요리와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음식점)에서 그릇은 마치 캔버스 같은 역할을 한다. 커다란 접시에 앙증맞을 정도로 적게 담긴 요리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예술품처럼 제시된다.

[맛있는 월요일] 음식의 완성, 그릇

 ‘눈으로도 먹는’ 시대다. 변덕스러운 입맛에 호소하기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 레스토랑의 명성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 한국편 발간이 머지않았다는 풍문이 돌면서 일부 식당은 수백, 수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고급 식기로 갈아치우기도 했다. 셰프들 간의 ‘음식 대전’에서 맛이 1라운드라면 푸드 스타일링을 비롯한 테이블 세팅이 2라운드이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들이 셰프들의 선택을 받아 손님 식탁에 오르는 걸까. 개성적인 음식만큼이나 그릇을 고르는 취향도 제각각이다.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봤다.

 해외 컬렉션형=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릇을 수북이 수집해 오는 이들이다. 서울 청담동에서 ‘정식당’을 운영하는 오너셰프 임정식은 잦은 해외 출장과 초빙행사 때 현지 그릇을 눈여겨봤다가 사들인다. 특히 국내에서 유려한 곡선의 스페인 그릇 열풍을 주도했다고 알려진다. 현대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美食) 창작요리를 혁신한 것으로 평가되는 스페인은 이에 맞춤한 그릇들도 대거 선보여 왔다.

 프렌치 레스토랑 ‘더그린테이블’(서울 서래마을) 김은희 셰프도 그릇 욕심이 많기로 유명하다. 세계적인 소비재·인테리어 박람회 ‘메종&오브제’가 열리면 발품 아끼지 않고 달려가 하나라도 건져 온다. 언니(김윤정)가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자매가 경쟁적으로 수집한 고혹적인 그릇들이 레스토랑 2층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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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과 용기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합의 아름다움. 모던 한식 레스토랑 ‘권숙수’가 추구하는 음식도 이와 같다. [사진 각 업체]

 팔도유랑형=모던 한식 레스토랑 ‘권숙수’(서울 강남구 신사동) 권우중 셰프의 ‘합(盒) 사랑’은 유명하다. 뚜껑 있는 전통 그릇 중 하나인 합은 주로 간단한 주전부리를 담는 용도로 쓰였다. 권숙수에선 여기에 코스 요리의 애피타이저나 제철 회를 담아내고 있다. “한 치 오차 없이 맞아떨어지는 합의 형태가 한식의 기품을 높인다”는 게 권 셰프의 설명이다.

 “한식이 서양 접시에 담긴 걸 보면 슬프기까지 해요. 합 같은 건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내야 해서 그 자체로도 가치가 높아요. 특히 장작 가마로 구워내 ‘불맛’이 살아 있는 전통 도기를 즐겨 씁니다.”

 괜찮은 그릇이 있단 말이 들리면 전국 어디라도 달려간다. 평소엔 골동품의 메카인 황학동 시장을 돌아다니며 ‘득템’을 노린다. 권숙수의 식기는 80%가 경기도 이천의 소규모 도예공들에게서 사들인 ‘작품’이다.

 경계 허물기형=‘유니크(unique·독특함)’를 내세우는 프렌치 레스토랑 ‘류니끄’(강남구 신사동)에선 종종 ‘이거 그릇 맞아?’하고 놀라게 된다. 고전 명화 액자를 연상시키는 접시라든가, 이끼가 수북이 담긴 나무 상자 같은 것들이다. 류니끄의 류태환 셰프는 “메뉴 연구가 끝나면 그 음식에 맞는 그릇을 제작한다”며 “쓰는 접시의 80%가 음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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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니끄’의 대구, 닭가슴살 요리. 파도 치는 파란 바다를 형상화한 접시에 담아낸다(左), 유리 건조 용기에서 건초향을 입혀 내는 메추라기 요리. ‘류니끄’의 시그니처 메뉴다. [사진 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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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포포’에선 자연과 그릇의 경계가 없다. 충남 안면도의 적송 토막에 담아내는 ‘감자칩 튀일’. [사진 각 업체]

 류니끄엔 ‘디시(dish) 디자인팀’이 따로 있다. 화제가 된 액자 접시뿐 아니라 이번 시즌에 선보이는 ‘주얼리 박스 디저트’도 류 셰프와 디자인팀이 협의한 결과다. 디저트 접시는 반투명 아크릴로 제작해 마치 기념패 같은 느낌도 준다. 씻어 재사용할 수 있게 특수제작했다.

 나무토막·조약돌도 훌륭한 플레이팅 소재가 된다. ‘테이블포포’(서래마을·김성운 셰프)에선 코스 요리의 시작인 감자칩 튀일(바삭한 튀김의 일종)이 충남 안면도의 적송(赤松) 토막에 담겨 서빙된다.

 광주요 컬래버레이션 퍼레이드=음식과 그릇의 어울림을 중시하는 셰프들은 종종 맞춤 제작에 나선다. 최근엔 한식기의 변신이 독보적이다. 한 상 위에 다 차려내는 전통적 ‘공간전개형’ 플레이팅 때는 개별 그릇이 주목받기 힘들었지만, 요즘 모던 한식에선 서양 요리처럼 ‘시간전개형’ 코스 요리를 낸다. 자연히 각 음식과 그릇의 조화가 우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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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요그룹이 ‘정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구절판을 위해 맞춤 제작한 전용 접시.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한 전통 자기가 ‘뉴코리안’ 한식을 돋보이게 한다. [사진 임현동 기자]

 전통 자기인 ‘광주요’를 만드는 광주요그룹은 지난해 10월부터 ‘마누 테라스’(서울 청담동·이찬오 셰프), ‘권숙수’ ‘정식당’ 등과 컬래버레이션을 펼치고 있다. 각 셰프가 원하는 스타일의 그릇을 광주요의 기법과 철학을 담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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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기의 매력은 세계적인 미슐랭 스타 셰프들도 끌어들이고 있다. 광주요와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기획 제작한 토머스 켈러.

예컨대 정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구절판은 원래 이탈리아 크리스털 식기에 담겨 나왔다. 그런데 이 기성품 식기는 7개의 홈만 파여 있어 구절판 재료 9개를 다 담지 못했다. 광주요는 임 셰프의 스타일을 살리면서 9개 메뉴를 담을 수 있는 식기를 유백색과 먹빛 두 가지로 제작했다.

 광주요 그릇을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그룹이 운영하는 두 레스토랑 ‘가온’(강남구 신사동)과 ‘비채나’(서울 한남동)다. 개당 30만~100만원을 호가하는 그릇들이 제철 요리에 맞게 번갈아 선보인다. 둘 다 자체 라인업을 생산해 일반 소비자에게도 판매 중이다.

 해외 셰프들도 한식기에 관심을 보인다. 광주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레스토랑 ‘베누’로 미슐랭 3스타를 따낸 셰프 코리 리와 2년간 머리를 맞대 ‘코리 리 컬렉션’을 개발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코리 리는 “광주요 그릇이 내 뿌리와 정체성을 드러내준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또 다른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토머스 켈러도 레스토랑 ‘프렌치 론드리’ ‘퍼세’에 광주요 라인을 도입했다. “세계 음식이 퓨전화하면서 화려한 음식을 뒷받침해주는 단아한 그릇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중”이라는 게 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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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요가 2015년 해외 시장을 겨냥해 오픈한 온라인몰에선 1년 만에 약 1억5000만원 상당의 그릇이 팔렸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음식상식서양 접시, 디시 → 플레이트 → 플래터 순으로 커져

서양 접시는 용도·크기·모양에 따라 디시(dish)·플레이트(plate)·플래터(platter)·소서(saucer)·트트레이(tray) 등으로 구분한다. 디시·플레이트·플래터 순으로 소·중·대형 접시에 해당한다. 소서는 찻잔·커피잔 등을 받치는 접시이고 트레이는 재떨이처럼 바닥이 편평하고 짧게 수직적 깊이를 가진 접시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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