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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체 관리자라는 인식 가져야 북한 이끌 수 있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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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8 면

11년 만에 전면 폐쇄에 들어간 개성공단은 건설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북한군은 물론 동맹국인 미국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난관을 뚫고 남북한 사람들이 매일 한자리에 모여 스킨십을 나누는 통일학습장으로서의 개성공단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 결실을 맺기까지 막전 막후의 협상을 주도한 주인공이 서훈 이화여대 북한학과 초빙교수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 3차장을 지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들을 가장 많이 접촉했던 당국자로 꼽힌다. 그는 공직생활을 접은 뒤 공개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업으로 서울시내에 와플가게를 열고 연구실에 들어앉아 북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를 다시 불러 낸 건 최근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다. 지난 19일 이화여대에서 그를 만났다. 당시 정부가 그렸던 개성공단 설계도의 종착점은 어디였는지, 밤이면 암흑천지가 돼 버리는 개성공단에 언제 다시 불을 밝힐 수 있을지 그 해법을 물었다.?

서훈(徐薰·62) 현재 이화여대 북한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가정보원에서 대북업무를 주로 담당한 안보전문가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여러 차례 만났으며 장성택· 김양건 등 북한의 주요 인사들과도 협상을 벌였다.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협상을 막후에서 성사시켰으며 2007년 남북총리회담 대표로도 활동했다. 남북 대규모 경협 프로젝트인 개성공단 건설을 위한 협상도 주도했다. 1997~99년 북한 신포지역 경수로 건설을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업 시 북한 금호사무소 한국대표로 북한에 2년간 상주한 첫 번째 한국 당국자이기도 했다.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와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을 졸업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리서치 펠로를 지냈다. 2008년엔 『북한의 선군외교』를 펴냈다.

-개성공단이 완전히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개성공단은 갈 때마다 변모했다. 아침에 북한 근로자들이 수백 대의 출근버스를 타고 공단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 통일의 현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통일의 미래를 봤다. 공단 가동 중단은 지금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피해액이 얼마라는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관련한 장기적인 전략적 미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다. 하루아침에 이런 상황이 돼 버려 착잡한 심정이다.”


-착공한 지 불과 1여년 만에 제품이 나올 정도로 신속히 진행됐는데. “당시 남북 모두 이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 했다.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나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 역량을 집중했다. 대북화해협력정책에 가장 부합하는 현장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집중을 했다. 북한은 북한대로 절박했다.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결정한 일이라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북한의 전략에서도 우선순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반대를 어떻게 설득했나.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의 현상 유지가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고 이것이 그들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본다. 통일된 한반도에서는 복잡한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미국 입장에서는 군사분계선에 붙어 있는 6612만㎡(약 2000만 평)의 대규모 개성공단에서 전개되는 남북 경협사업이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현상 변화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해야 했다. 그 과정은 힘들었고 짧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도라산역을 둘러보고는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후론 비교적 쉽게 풀려 나갔다.”


-통행로 관리 문제도 간단치 않았을 텐데. “판문점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개성과 문산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 직통로를 만들어 이용하기로 했다.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DMZ)는 유엔군 관할이다. 이것을 우리가 남북 관리구역으로 넘겨받았다. 이는 정치·군사적으로 굉장히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앞으로 평화체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한반도 당사자의 지위와 입장, 발언권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 남북관계 특수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다른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할 때도 우리 정부가 많은 노력을 했다.”


-북한 근로자들에게 지불되는 달러가 핵·미사일 개발에 전용됐다는 의혹이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엔 문제 삼지 않았나. “이것도 숫자로 따질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으로 봐야 한다. 북한은 잘 알다시피 사회주의 중앙기획경제, 통제경제체제다. 북한과 거래하는 어떤 기업이나 국가의 외화는 중앙에 집중돼 바스켓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직장 선택권도 없다. 임금이 지불되면 일부는 북한 당국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근로자들이 가져가는 시스템이다. 과거의 북한 경수로 건설을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업 때도 그랬다. 미국이 주도한 이 협상에서도 우리는 북한 근로자들에게 직접 수혜가 돌아가게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좁혀지지 않는 문제다. 우리가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직접 주겠다는 것은 북한더러 사회주의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과 협력사업을 하고 돈거래를 할 때 불가피한 일이다.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달러를 막는다고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일시적 가동 중단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안전장치를 좀 더 확실히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남북 간에는 이번에 벌어진 일처럼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종종 생긴다. 그러나 우발적인 상황이 닥쳐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작은 계기로 다시 불씨를 살려 분위기가 반전되기도 한다. 개성공단은 남과 북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곳이다. 잘 살려 내는 것이 중요했다. 개성공단을 재개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의 평화도 없고 경협도 없고 통일로 가는 길도 험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재가동해야 된다는 의견도 많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을 다시 열지 못하게끔 고리를 너무 단선적으로 강하게 걸어 놓았다. 그런 점이 앞으로의 가동 재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대북정책에서는 굉장히 냉정한 계산이 필요하다. 감정에 치우쳐 즉흥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북한을 완벽하게 봉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책은 희망사항의 나열이 돼서는 안 된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의 ‘임금 전용’ 발언이 논란거리가 됐다. “북한 근로자들에게 지급된 임금이 핵 개발에 사용됐다고 하는 주장 등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치밀하게 사전에 준비한 조치가 아니라는 인상이 든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개성공단 외에도 여러 통로로 북한에 달러가 들어갔다. 북한을 여행하고 북한 기업과 거래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핵 개발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나. 그런 모든 걸 우리가 다 봉쇄할 수는 없다. 대북정책에서 대중정치에 무게를 두면 안 된다. 제재나 압박이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다. 제재를 가하면서도 이를 푸는 절차에 대한 경로를 보여 준 적이 없다. 구체적인 로드맵을 보여 줘야 한다.”


-제재로만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해법은 대화밖에 없다. 이란의 예에서 보듯이 어떤 제재나 봉쇄도 마지막엔 대화를 통해 열매를 따는 거다. 최근에 햇볕정책이 실패했다는 말들을 한다. 별명이 햇볕정책이지 내용은 사실 화해협력정책이다. 이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 민간 교류가 많아지고 남한이 잘산다는 정보가 북에 들어가는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의 전략적인 목표가 조금씩 달성되는 거다. 우리는 지금까지 노태우 전 대통령 때 시작했던 화해협력정책을 초당적으로 제대로 시행해 본 적도 없다. 대북정책에 만병통치약은 없다. 비핵화를 위해서라도 6자회담과 남북 회담 투 트랙이 하루빨리 열려야 한다. 어느 하나만 열려서는 효과적으로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남북관계가 없는데 6자회담만 열린다면 우리의 역할이 없을 것이다. 거꾸로 남북관계만 있어서도 국제 현안인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남북관계가 없을 때 미국과 중국은 우리의 입장을 무시할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남북관계가 삼손의 머리카락과 비슷하다. 그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면 보통의 힘없는 존재로 되돌아가게 된다. 앞으로 회담이 열리는 계기가 분명히 올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필요할 경우 물러서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봐 왔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그런 모멘텀을 우리 정부가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필요하다. 우리가 유도할 수도 있고 북한이 그런 조치를 취할 때 우리가 이것을 받아 우리의 전략적 의도에 부합하도록 끌고 갈 수도 있다.”


-5월로 예정된 노동당 7차 대회까지는 긴장 고조 기조를 유지할까. “극단적으로 초강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당 대회 자체가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우월성을 북한 주민들이 깨닫게 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평화유지전략이 중요하다. 서독의 동방정책도 화해협력교류가 기본정신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나 북한의 도발은 상수였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관리해 내느냐다. 우리는 남한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관리자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북한과 상대할 때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번에도 남남 갈등현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초당적 대처와 국민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리더십을 잘 발휘해야 한다. 반대가 있다고 국론 분열이라고 몰아치면 안 된다. 이런 일일수록 야당과 주요 사회지도자들과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참여와 도움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남북관계에서 진보와 보수 구분은 없는 것이다. 평화적인 통일이라는 우리의 목표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은 초당적이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폭탄주 제조법을 알려 줬다고 하는데. “김 위원장을 비롯해 장성택·김양건 등 북한 측 주요 인사와 실무자들을 많이 만났다. 김 위원장은 포도주를 조금 마시는 정도였다. 북측 인사들은 우리가 사적인 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시는 것에 흥미있어 했다. 남북 지도자들은 어찌 됐건 얼굴을 마주 보고 자주 만나야 한다. 국가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적 정보다. 평양의 주요 호텔에 남한 사람이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었다. 북측이 남쪽 사람들을 관리하느라 힘들다고 말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접촉하다 보면 그들의 속내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개성공단이 확장되면 북한 근로자가 30만 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다.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면 체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고민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120만 명이 남측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자주 만나야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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