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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졌던 제갈량 정통성·충성심 덕에 ‘천재 꾀돌이’ 신격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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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24면

중국 민간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여지는 제갈량(諸葛亮)의 초상.

어중간한 자리에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위기를 넘기고, 남의 마음을 먼저 드러나게 함으로써 결정적인 이익을 취하는 음흉함을 펼치다가 급기야 촉한(蜀漢)의 황제 자리에 오른 유비(劉備)의 이야기는 건너뛰자.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그야말로 인물 중의 최고 인물로 꼽히는 제갈량(諸葛亮)의 이야기가 그래도 우선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개운치가 않다. 바람과 비를 맘껏 불러들이는 호풍환우(呼風喚雨)는 차치하고라도, 그는 아무래도 사람이라기보다 신(神)이다. 적어도 나관중(羅貫中)이라는 명나라 때 작가가 집대성한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노신 “제갈량 꾀 표현하다 요괴처럼 둔갑”그러나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밟히는 법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에 어느 정도 익숙한 나이가 되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포장으로 제 몸을 감싼 이에게는 자연 의심의 눈길을 두는 법이다. 중국 현대문학의 문호로 꼽히는 노신(魯迅)이 그랬다. 그는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에 관한 평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하나를 남긴다. “제갈량의 많은 꾀를 표현하다가 요괴처럼 둔갑시켰다”는 내용이다. 그에 바로 공명(共鳴)이 일 만큼 소설은 너무 소설적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뜨기 전 자주 북벌(北伐)에 나선다. 촉한이 자리를 잡고 있던 현재의 중국 쓰촨(四川) 지역으로부터 험악한 산지를 지나 북쪽에 있던 산시(陝西)와 허난(河南) 지역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촉한의 숙적인 위(魏)와의 정면대결이라 볼 수 있었다. 모두 여섯 차례의 공격에 나선다.


소설은 이 부분을 장엄하게 그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다’는 식의 설화적 요소를 듬뿍 얹으면서 말이다. 그 가운데 역대 중국인들, 그리고 소설을 읽은 동양의 독자들이 지금까지도 흥미진진하게 ‘이바구’를 펼치는 내용이 바로 공성계(空城計)에 관한 제갈량의 행적이다.


이 내용은 대부분 안다. 위나라 군대에 몰려 위기에 봉착한 제갈량의 군대가 서성(西城)에 몰려들어 위나라의 추격 대군을 맞는 장면이다. 성 안의 제갈량 군대는 모두 합쳐봐야 2500여명. 그보다 훨씬 많은 위나라 군대에 의해 작은 성안에 몰렸으니 제갈량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소설은 얼마나 대단한 광경을 그려내나. 성문을 활짝 열어젖힌 제갈량이 성벽 위에 올라 거문고를 타는 장면으로 말이다. 위나라 장수 사마의(司馬懿)는 그 장면을 보고 바짝 긴장하며 의심에 의심을 이어갔다고 한다. ‘우리를 매복에 들게 하려는 전략…?’ 계산이 복잡해진 위나라 군대는 결국 물러났고, 신의 경지를 선보인 제갈량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게 이야기의 전말이다.


애초 그런 장면은 전쟁에서 없었다. 제갈량이 야심차게 벌인 제1차 북벌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실제의 전쟁에서 제갈량은 참패를 당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반대했고, 죽기 전의 황제 유비가 “저 놈 정말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유언까지 남긴 마속(馬謖)을 전선 지휘관으로 잘못 내세운 제갈량의 패착 때문이었다.


나중에 서진(西晉) 건업의 대문을 열어젖힌 싸움의 명수 사마의 또한 그 장면에 등장해서는 곤란해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서성으로부터 1000 여리 멀리 떨어진 낙양(洛陽)에 있었다. 제갈량이 직접 이끄는 군대와 조우할 공간적인 조건이 전혀 맞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냥 소설속의 허구(虛構)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사안이지만, 문제는 제갈량의 지나친 신격화, 나아가 노신의 말대로 요괴화(妖怪化)의 범주에까지 미치는 날조(捏造)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신비로운 행동의 제갈량은 중국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의 힘에 올라타 수많은 중국인과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더 그렇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흔히 가정(街亭)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접전 과정 중 마속이 이끈 촉한의 군대가 위나라 군대에 크게 패해 아무런 소득 없이 회군한 과정이다. 우리가 더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죽은 군주 유비, 촉한의 여러 대신들이 모두 반대한 마속을 전선 지휘관에 임명했던 제갈량의 오판이다.


아무튼 제갈량은 죽기 전까지 끈질기게 북벌에 나서지만, 결국 촉한의 기울어지는 국운을 더 재촉할 정도로 거듭 위나라 군대에게 진다. 식량도 달리고, 험한 산지를 행군하느라 군대의 체력도 다 떨어진 상태에서 촉한의 군대는 계속 패하지만 소설은 그런 위기를 돌파하는 제갈량의 눈부신 활약으로만 일관한다.

유비와 복숭아 과수원에서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함께 하자”고 맹세했던 관우(關羽)는 분명 용장(勇將)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는 작지 않은 문제가 숨어 있다. ‘조심대의(粗心大意)’라고 중국인들이 부르는 대목이다. 쉽게 말하면 디테일에 약하다는 뜻이다. 가벼운, 그래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여느 직장에서도 이런 사람은 곤란한 법이다. 사회생활에서도 디테일에 너무 무디면 사고를 쳐도 제법 크게 칠 수 있다. 하물며 사람 목숨이 순간적으로 휭~하고 날아가는 전쟁터라면 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용맹하고 충직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관우다. 그러나 그에게는 디테일이 정말 부족했다.


촉한의 군사(軍師) 제갈량은 이런 관우의 문제를 간과했다. 촉한의 터전인 익주(益州)로 전략적인 이동을 하면서 제갈량은 형주(荊州)라는 곳을 관우에게 맡긴다. 이 형주라는 곳은 지금의 중국 후베이(湖北)에 있는 전략 요충지다. 촉한이 본거지로 삼은 익주는 쓰촨 지역의 복판이다. 이곳은 북으로는 거대한 산지로 막혔고, 동쪽으로는 험악한 골짜기에 막혀 있다.


한 번 발을 들여 그 안에 정착하면 거대한 산지와 막막한 골짜기에 갇힌다. 따라서 그 외연의 전초(前哨) 기지라고 할 수 있는 후베이의 형주를 잃는 경우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절대의 고립, 나아가 오지의 변방 정권으로 운명을 마감하는 일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그런 형주를 ‘디테일에 매우 둔감한’ 관우에게 맡긴 점 또한 제갈량의 큰 실수로 꼽힌다. 마침 관우는 동쪽에서 큰 기세로 성장해 이미 자신의 실력을 압도하고도 남았던 동오(東吳)를 얕잡아보는 편이었다. 따라서 그런 장수에게 형주의 운명을 맡긴 제갈량의 판단은 큰 문제였다.


그 점 때문에 남양(南陽)의 초막에서 천하를 3등분하자는 내용의 위대한 전략적 시야를 내세웠다는 제갈량의 신화도 흔들린다. 흔히 ‘융중대(隆中對)’라고 하는 그의 계책은 원래 ‘지적재산권’을 따지자면 그의 소유가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설령 그가 처음 내세운 계책이었다고 해도 형주를 관우에게 맡겨 결국 동오에 내줌으로써 절대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점은 전략가로서의 제갈량이 지닌 역량을 의심토록 만드는 대목이다.


아울러 그는 북벌을 단행하기 전에는 일선의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거의 없다. 말년에 전포(戰袍)를 걸쳐 입고 나선 북벌에서도 참패만을 거듭했다. 동풍(東風)을 불러 적벽의 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를 화장(火葬)시키고, 수장(水葬)시켰다는 내용은 소설 속의 허구이자 날조다.

 음모·술수보다 필요한 요소는 명분 그럼에도 그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보다 더 높은 신으로 자리매김한 사람은 사실 관우다. 관우는 통치왕조가 강요했던 미덕, 즉 충국(忠國)과 충군(忠君)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신에 해당한다. 왕조의 통치 이념에 따라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러나 제갈량은 민간이 떠받드는 이상적인 인물로 변했다.


제갈량은 중국의 가장 오랜 ‘문화 현상’의 하나다. 제갈량이 죽은 뒤 곧 그에 관한 미담이 이어졌고, ‘안사(安史)의 난’ 등 내전이 극심했던 당나라 때에 천재적 시인 두보(杜甫) 등에 의해 문학적인 찬사가 덧붙여지다가 송(宋)대와 원(元)대를 거치면서 민담의 전승이 합류하면서 부피가 더 커졌다. 급기야 나관중에 의해 정교한 민담의 집대성이 이뤄지면서 그는 역대 중국인들이 가장 숭앙하는, 생존과 승리를 위한 지혜와 모략의 대명사로 변했다,


이 점이 미스테리다. 싸움에서 늘 패한 그였음에도 소설에서의 가공(加工)과 분식(粉飾)을 거쳐 너끈하게 신격화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는 중국의 모략이라는 정신세계의 진면목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다. 모략에는 승리의 구체적 방도 외에 튼튼한 ‘명분’이 가세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 아닌 역사 속의 제갈량이 지닌 미덕은 뚜렷하다. 한(漢) 왕실의 적통(嫡統)을 이었다는 유비의 조력자라는 점, 큰 전략적 시야로 천하의 삼분지계를 실행에 옮겼다는 점, 유비와의 약속을 지켜 그의 아들 유선(劉禪)을 죽을 때까지 충정(忠情)으로 보필했다는 점 등이다.


소설에서 제갈량이 꾀로만 일관했다면 그는 진정한 중국 민간의 영웅으로 진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얼굴’에 해당하는 명분에서 제갈량은 다른 누구보다 떳떳하며 기개가 크다. 그런 ‘얼굴’에 중국인들은 지혜와 모략을 덧붙였던 것이다.


중국인이 지향하는 지혜, 모략의 정신세계는 복잡하다. 제갈량처럼 ‘얼굴’이 제대로 생겨야 지혜와 모략이 빛을 발한다. 보통은 ‘명분’과 ‘실제’로도 나눌 수 있는데, 그 두 축선의 엇갈림과 변주(變奏)가 제법 요란하다. 모략을 그저 ‘꾀’라고도 할 수 없고, 음모(陰謀)와 술수(術數)라고도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그 속내는 복잡하고 깊으며, 또한 어둡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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