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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명계남 ‘게릴라 무대’에 세워 개판된 연극계에 깽판으로 맞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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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16면

이윤택 예술감독이 직접 디자인해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을 받은 ‘방바닥 긁는 남자’ 세트. 밀양에서 주워 온 폐자재로 만들어 바닥 까는 비용 10만원 외에는 한 푼도 들지 않았다.

1986년, 부산 광복동에서 진격을 시작했다. ‘시민K’(1989) 등 사회성 짙은 무대로 전국을 뒤흔든 뒤 ‘오구’(1990) 등 한바탕 굿판을 벌여 해외 무대를 개척했다. 99년 경남 밀양에 ‘밀양연극촌’이라는 전례없는 자급자족 연극인공동체를 꾸렸고, 2004년엔 상업주의가 판치는 서울 대학로에 전용극장을 짓고 순수 연극의 마지막 보루를 자처해 왔다.


서울과 지방, 국내와 해외,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한국 연극사를 새로 써 온 ‘문화 게릴라’ 이윤택(64)의 연희단거리패가 30주년을 맞았다. 1년 내내 이어지는 30돌 기념 공연의 첫 테이프는 직접 연출한 ‘방바닥 긁는 남자’(28일까지 게릴라극장)로 끊었다. 최근 국립극단·국립국악원 등 국공립단체에서 굵직한 대작을 선보이며 웰메이드 연극 열풍을 견인해 온 대표적인 연출 거장이 기념비적인 해를 70석 규모 소극장에서 연 것이다. 시작만 미약(?)한 게 아니라 전체 라인업을 소극장에서 소화하는 ‘소극장 부활 프로젝트’를 천명하고 세속화의 극치로 ‘개판’이 된 연극계에 ‘깽판’으로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시 게릴라로 돌아온 거장은 보수화된 한국 연극계를 어떻게 교란시킬까.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작들. 좌로부터 ‘햄릿’‘문제적 인간 연산’‘방바닥 긁는 남자’‘오구’‘혜경궁 홍씨’

‘방바닥 긁는 남자’는 연희단거리패 출신 작가 김지훈이 쓰고 고(故)이윤주 연출이 2009년 초연한 블랙코미디다.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을 받았던 이윤택이 이번엔 직접 연출을 맡았다. 연희단의 간판스타들이 아니라 지방에서 활동하는 무명 배우들이 나서는 이 ‘가난한 연극’이야말로 극단의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대표한다는 뜻에서 첫 작품으로 골랐다.


무대는 놀랄 만큼 지저분했다. 땟국물을 줄줄 흘리며 단칸방에 처박혀 살아가는 네 남자가 있다. 신문지로 세수를 하고 3년마다 팬티를 갈아입으며 게으름의 한계에 도전하면서도 권력과 독재 놀이를 즐기는 거지꼴 사내들의 황당한 말싸움이 현실사회를 차지게 놀려댄다. 리얼하되 일상적이지 않은 오달수식 메소드 연기도 관객을 깨우는 데 한몫 한다. 편지로 주문해 도착한 자장면을 둘러싼 난장판은 객석을 공포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국민을 무기력화 시키기 위한 비밀 국책사업의 완성품이 ‘누룽지 인간’인 자신들이라 믿고 결국 방을 나선 저들은 ‘누룽지 인간의 은둔 생활 마감’이라는 인류학적 대사건을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신문사를 향한다.


“방바닥 걷어차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얘기에요. 선동적이지 않고 세련된 블랙유머죠. 초연 때만 해도 우화였는데 지금은 리얼로 보인다고 해요. 그게 연극이죠. 자장면이 튀고 냄새가 진동하는 소극장에서 같이 느끼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생각케 하는 게 바로 연극의 본령입니다.”


이윤택은 지난해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100점 탈락’ 사건으로 뜻밖에 문화계 검열 논란의 중심이 됐다. 하지만 그는 “저항도 순응도 안 한다”며 여유롭게 웃어넘겼다. “올해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출품할 거예요. 또 떨어뜨리나 보려고(웃음). 절대 항변하지 않되 계속 올릴 겁니다. 떨어뜨리면 할 수 없고.”


다만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맞은 30주년을 ‘지금 우리 연극의 방향성’에 대한 입장 표명의 기회로 삼아 ‘대단히 재밌고 불편하고 징그러운 소극장 연극’으로 세속화된 연극계에 딴지를 걸기로 했다. “소극장의 의미는 완성되지 않은 젊음이죠. 아웃사이더들이 자기 입장을 자유롭게 대변하는 공간이에요. 기성세대 중산층이 삶을 성찰하게 하는 세련된 중대극장 연극과는 다르죠. 양쪽이 상호보완적으로 가야하는데 지금은 중대극장 싹쓸이에요. 관객과 매스컴 모두가 소극장을 외면하는 지리멸렬 상태죠. 나도 30주년 맞아 대접받으며 거장 노릇도 하고 싶지만, 지금의 풍토에서 나라도 여전히 늙은 게릴라로 존재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 같아요.”


무대에서 밀려난 연극인들을 위해서도 발벗고 나섰다. 올초 60대 배우들이 뭉친 중견연극인창작집단을 위해 연출한 ‘바냐아저씨’는 연일 매진사례로 앙코르 공연까지 돌입했다. “배우는 나이를 먹어야 연기가 우러나요. 독일 도이치극단은 40살이 안 되면 무대에 못 서고 60살이 돼야 주연을 하는데, 우리는 노인 박대죠. 기주봉·김지숙 등이 다 8~9년 무대에 못 섰어요. 늙은 배우들의 반란인 셈인데,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니 왕년 관객들이 몰려왔죠. 기주봉 같은 배우의 바냐 연기는 젊은이들이 따라갈 수 없는 리얼리티를 주거든요. 전에 대마초 피우다 잡혔는데 담당 검사가 기록을 남겼어요. “지금까지 마약사범 중에서 가장 정직하게 다 털어놓고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고(일동 박장대소). 그런 친구들이 삶 자체를 연기와 직결시키는 고전적인 의미의 연극배우죠.”


30주년 라인업에도 극단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기국서·채윤일·윤대성 등 무대를 잃어가는 연극 동지들을 위한 작품을 대거 올려놓았다. “70년대 전위연극을 이끈 기국서가 막노동을 하고 있어요. 채윤일 선생도 세실 40주년 공연도 못했고, 윤대성 작가는 내 작품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는다며 무조건 대본을 보내왔죠. 이 작은 게릴라극장에서 젊은이와 늙은이 욕구를 다 수용하며 가는 30주년의 의미가 나로선 당당합니다. 사회가 성숙하려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가 완성돼야 하는데, 요즘엔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담론이 없어요. 세론잡설만 난무하죠. 새로운 담론이 없으니 이윤택 같은 똥차가 계속 소리치고 있지(웃음). 새 담론이 나오면 내 것은 지나간 담론이 되겠지만, 지나간 담론도 의미가 있어요. 역사가 되니까.”


그는 이데올로기의 굴레에 연극이 갇혀버린 개판의 시대와 맞짱 뜰 ‘깽판’의 화룡점정으로 유인촌과 명계남을 게릴라극장에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한국 연극이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연극 그 자체로 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징적 사건이란 것이다.


“그들은 우리 연극 그 자체에요. 좌건 우건 배우는 무대에 서야죠. 충분히 실현가능합니다. 밀양에서 축제를 하면 유인촌 선배도, 명계남도 왔죠. 밀양에선 그들도 여야가 없었어요. 작년 ‘페리클레스’를 보니 유인촌은 살아있더군요. 정치적 공과를 떠나 최고의 배우는 무대에 서야 합니다. 올 연말에 계획중인 베케트의 ‘엔드게임’은 그만이 할 수 있어요. 이 작은 극장에 당당하게 세울 겁니다. 명계남도 놀라운 배우죠. 세실 40주년 작품 ‘알프스의 황혼’에 우리 극단 최고 배우인 김소희와 붙여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증명해 보일 겁니다.”

“우울한 이야기도 유쾌하게 푸는 게 한국 연극” 86년 신문기자를 관두고 ‘우리 연극’을 하는 광대로 살기로 한 그는 회사를 나와 가장 먼저 굿을 보러 갔다. 기장 대병마을에서 3박4일간 동해안별신굿을 보며 서양 연극과 차별화된 우리 연극의 원형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의 무대는 늘 한바탕 굿판 같다. 극단의 첫 작품도 ‘굿’이고, 대표작 ‘오구’ 역시 굿을 전면에 내세운다.


“굿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굿이 한국인만의 풍속이고 그 속에 우리 연극의 원리인 신명·풀이·굴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걸 현대 연극으로 푸는 게 내 일이죠. 문제는 우리 풍속이 없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출생·결혼·장례 등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식을 전부 공공적인 데서 해치우는 야만적인 21세기에 개인의 존재감은 대체 어디서 찾나요? 연극에서 찾죠. ‘오구’가 한국 연극사에 남는 이유는 장례 풍속을 보여주는 인류학적 의미 때문입니다. 굿이 없지만 ‘방바닥 긁는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일본 연극 ‘다락방’과 비슷한데, 일본 연출가가 보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더군요. 자기 거랑 내용은 똑같은데 어쩜 이렇게 시끄럽고 명랑하냐는 거죠. 이게 한국의 에너지에요. 우리 전통극엔 비극이 없고 우울한 이야기도 떠들썩하고 웃음 터뜨리게 하는 해학과 골계미만 있어요. 개똥밭에 굴러도 사는 게 좋다는 철저한 삶의 철학이죠. 그래서 ‘방바닥’이 이렇게 유쾌한 겁니다. 우리 전통을 배경에 깔고 있는 한국 연극인 거죠.”

연희단거리패의 30주년 라인업 작품들은 70석 규모의 게릴라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 연극 그 자체로 서야” 게릴라극장에서는 배우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무대 세트가 다 부서진 채라 촬영에 난감해 하니 10분 만에 뚝딱 세트를 세워준다. 극장 위 숙소에서는 단원들이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나름의 문화공동체를 지향하는 이상주의죠. 우리는 건강한 자본주의는 인정하지만 대중제일적 천민자본주의와 개인주의는 믿지 않아요. 숙식과 이동을 공동재산으로 해결하니 지출이 없어요. 내 월급이 200만원, 김소희 대표가 170만원인데 풍족하죠. 50만원 받는 21세 단원이 집에 30만원씩 부칩니다. 극도의 개인주의 속에서도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는 게 우리의 힘이에요.”


가장 독자적이고 강력한 연극 양식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극단이 됐지만 여전히 ‘모든 작품을 지방에서 제작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제도권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우리는 중심과 맞서는 싱싱한 외곽문화니까요.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한 적이 있는데 문화 게릴라가 제도권 수장을 왜 하느냐더군요. 외곽 사람도 마음먹으면 권력이 될 수 있어야 좋은 사횝니다. 영원히 못되면 노예사회죠. 2년제 방통대 졸업장으로 대학 학장까지 지낸 것도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 한국 사회의 지연·학연 등 모든 형식적 제약을 깨부수면서 돌아다닌 30년이에요.”


그는 올해를 끝으로 극단의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기장으로 내려간다. 7월 재개관하는 가마골소극장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며 훈수나 두겠다는 것이다. “노인이 전방에서 설칠 필요 있나요.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전에는 안 풀리면 집요하게 밤을 새워 해결했는데 이제 잠이 와요(웃음). 자신에게 관대해질 바에야 뒤로 물러나야죠. 후방에서도 할 게 많아요. 커피숍 ‘오아시스’는 젊은 시절 하루 14시간씩 죽쳤던 음악 다방인데 정말 오아시스 같은 쉼터를 다시 세우고 싶었죠. 포장마차도 엽니다. 부산일보 견습기자들이 만든 포장마차 ‘양산박’은 가난한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부산 문화의 복덕방이었죠. 그런 공간을 또 만들어줄 겁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연희단거리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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