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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만난 쉬윈, 사찰 돌며 “적의 소멸 기원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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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29면

1937년 봄, 남악의 유격간부 훈련원을 방문한 예젠잉(오른쪽 두번째). [사진 김명호]

쉬윈(虛雲·허운)이 쥐짠(巨贊·거찬)과 함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확실치 않다. 쉬윈의 말을 장제스가 못 알아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웃기만 하다 헤어졌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별 얘기가 다 나돌았다.

쉬윈과 쥐짠(오른쪽). 1958년, 운거산(雲巨山).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경호원 열명의 호위를 받으며 쉬윈이 있는 곳으로 갔다. 문 앞에 여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경호원들이 쏴 죽이려 하자 장제스는 화들짝 놀랐다. 쉬윈의 경호원일지 모른다며 총을 거두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쉬윈이 나타났다. 쉬윈의 곁으로 간 여우가 장제스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장제스가 폭소를 터트리자 쉬윈도 큰 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은 웃음 외에는 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말 안 해도 아는 사람들 같았다. 여우는 장제스가 떠날 때까지 쉬윈의 옆을 지켰다.”


쉬윈은 장제스만 만나지 않았다. 국민정부 주석 린썬(林森·임삼)과 정부요인들도 골고루 만났다. 승려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수수방관 하지 않았다. 전국의 사찰에 제의했다. “하루에 두시간, 참회 예불 시간에 적의 소멸을 기원해라. 불자들은 저녁을 굶자. 절약한 양식을 전재민(戰災民)을 위해 국가에 헌납하자.” 3개월간 충칭의 사찰을 돌며 법회도 열었다. 연일 만원이었다.


충칭(重慶) 나들이를 마친 쉬윈은 혼자 산으로 올라갔다. 쉬윈과 헤어진 쥐짠은 충칭에 머무르지 않았다. 홍콩과 광둥(廣東)을 경유해 후난(湖南)성 헝양(衡陽)의 남악(南岳)에 도착했다. 남악은 사찰 밀집지역이었다. 불교강습소 교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승려들의 항전을 독려했다. 대학선배 텐한(田漢·전한. 현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의 소개로 유격대 간부훈련차 와있던 예젠잉(葉劍英·섭검영)을 만났다.

부상병 치료법을 익히는 승려들. 1938년 남악. [사진 김명호]

쉬윈이 쥐짠에게 중임을 맡긴 것은 독특한 경력 때문이었다. 1927년 가을, 장쑤(江蘇)성 장인(江陰)현, 판추퉁(潘楚桐·반초동)이라는 미소년이 현립(縣立) 사범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타고난 미남에 수석 졸업,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굉장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아들 며느리 불러놓고 손자 장래를 걱정했다. “오늘 애 데리고 시장 갔다가 별꼴을 다 봤다. 예쁘게 생긴 동네 과부가 우리 애 보더니 얼굴이 빨개 지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라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쳐다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촌 구석에 내버려뒀다간 무슨 흉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 골병 들어 일찍 죽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오 밤중에 누구 칼 맞아 죽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이 참에 큰 도시로 보내자. 이왕이면 상하이가 좋겠다.”


마을 여자들과 할아버지 덕에 상하이에 나온 추퉁은 따샤대학(大夏大學·華東師範大學大學의 전신)에 입학했다. 당시 따샤대학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전 중국의 명문이었다. 미국이라면 뭐든지 떠받들던 중국인들이 ‘동방의 컬럼비아대학’이라 부를 정도였다. 추퉁은 한눈을 팔지 않았다. 도서관과 강의실을 오가며 학문에만 매달렸다. 대학 이사회 일원이었던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판추퉁의 호학(好學)과 박문강기(博聞强記)는 교내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학생시절 제자백가와 송명이학(宋明理學), 과학·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외국어도 완벽했다. 영어·일어·독일어에 막힘이 없었고 러시아 문자도 해독이 가능했다. 성격은 좀 유별났다. 침착할 때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 같았지만 격할 때는 거대한 파도를 보는 듯했다. 체력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밤마다 무술로 땀을 흘렸다. 행동도 민첩했다.”


추퉁은 급진적인 인사들과 왕래가 많았다. 시위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세상 꼬라지가 희한하게 보이자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흥미가 저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 매사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허락하시면 귀향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편지에 만족했다. 아들 내외를 불렀다. “모든 모순은 남녀관계에서 비롯된다. 이 애는 매사에 흥미를 잃었다. 어느 여자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고향사람들은 추퉁을 소학교 교장에 추천했다. 교사들은 젊은 교장을 잘 따랐다. 인근 중학과 고등학교 교사들도 뻔질나게 추퉁의 집무실을 드나들었다. 교사 봉급이 형편없을 때였다. 추퉁은 파업을 종용했다. 선언문을 직접 만들고 시위도 앞장섰다. 이웃 현까지 영향이 파급됐다. 다른 지역 교사들은 “추퉁을 본받으라”며 교장의 멱살을 잡았다. 얼굴에 여선생 손톱 자국 달고 다니는 교장이 한둘이 아니었다.


체포령에 현상금까지 걸린 추퉁은 항저우(杭州)로 피신했다. 도망자들이 피할 곳은 절 아니면 군대였다. 고찰(古刹) 영은사(靈隱寺)에 몸을 숨겼다. 공 밥 먹다 보니 승려들 보기가 미안했다. 아침 예불에도 참석하고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불교에 흥미를 느낀 추퉁은 불문에 귀의했다. 쥐짠이라는 법명을 받은 바로 그날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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