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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실패한 졸업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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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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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미국의 졸업식 시즌인 5~6월이 되면 숱한 명연설이 쏟아진다. 전직 대통령에서부터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그리고 유명 배우와 코미디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유명인들이 졸업식 연사로 나서 인생의 혜안을 담은 축사를 남기기 때문이다.

 한국 여고생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들고 유쾌하게 방한해 연일 SNS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하버드대 출신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 역시 그런 빛나는 축사를 남긴 유명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2000년 모교 연설자로 나서 실패에 대한 명연설을 남겼다. “칭찬받을 때도 있고 비난받을 때도 있고, 좋은 일만큼 힘든 일도 있지만 실수는 필수적”이라며 “실수는 졸업생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자신만의 길이 된다”고 했다. 이 연설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스탠퍼드대 축사(2005)와 함께 미 시사지 타임이 선정한 10대 졸업식 명연설로 꼽히기도 했다.

 비단 오브라이언뿐만이 아니라 ‘실패’는 미국 졸업식 축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핵심 키워드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2013년 프린스턴대 졸업식에서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실패는 인생과 배움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라며 실패의 미덕을 이야기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지난해 남부감리교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나처럼 C학점을 받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말해 환호를 받았다. 나쁜 학점이 인생의 실패는 아니라는 걸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때론 초청 연사의 고액 연설료 탓에 논란을 빚기도 하지만 미국 졸업식의 주인공은 분명 졸업생이다. 누구든 연사로 나서면 졸업생에게 따뜻한 격려와 조언을 해준다. 굳이 실패를 얘기하는 이유 역시 작은 실패에 좌절하기 쉬운 졸업생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국 졸업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졸업생 대다수가 주인공은커녕 들러리만 서는 건 이미 오래된 얘기다. 심지어 최근엔 학원사업가 출신의 은광여고 이사장이 명문대 진학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 학생들에게 실망했다는 ‘축사’를 해 논란을 일으켰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덕담까진 못하더라도 SKY 진학 못하면 실패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누가 봐도 졸업식 날 예의는 아니다. 졸업식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사장 한 사람 탓에 실패한 졸업식으로 오래 인구에 회자될 것 같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